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잠언21장1-15절의 말씀은
어제 하나님께서 목교세들에 의하여 심하게 본질이 변질 왜곡된 말씀 중에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 와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라는 말씀은
목교세들이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 억지 주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이 말씀의 적용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 천제증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천제증인의 삶이란 타인이나 외인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조각바람처럼 자신이 살기 위한 삶이다. 그런데 이를 직접 도전해보지 못한 목교세들은 사랑 없는 삶이라고 할지 몰라도 직접 도전해보면 더 사랑이 충만함 삶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주신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는 말씀도 당시의 편리와 유익을 위하여 만든 제도나 규정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고정 관념을 깨고 살아있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하신 후
오늘도 주시는 말씀도 말씀대로만 살면 예수 없이 스스로 의로워져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삶의 모형들을 보여 주시지만 결과는 우리들의 문제로 인하여 더욱더 예수 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오늘주신 말씀 중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와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는 말씀은 좀더 깊이 묵상을 해 보자
먼저 목교세들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는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여 우리 스스로 이제는 공의와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는 짓거리들이 바로 제사들 드리자는 삶을 살자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공의롭고 정의로운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 단 한 분밖에 없으며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성경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자고 하며 제사처럼 중심은 세상으로 가득하지만 좀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외형을 위하여 외식을 하면서 가면을 만들며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하는 불의와 불법으로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수배자가 있는 곳을 출입하던 조계종 총무원장인가 누군가를 검문 했다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이번에는 뉴스엔죠이에서 시위하는 목사를 연행했다고 큰일처럼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다" 라는 기사까지 쓰며 날리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자신들의 특별한 사람으로 크게 착각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고 싶으면 이 세상의 지도자가 되어야지 스스로 종교 지도자라고 하면서 왜 이 세상에서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것일까? 양심불량처럼 그리고 이것이 공의이고 정의라며 억지를 부리면서 …
그리고 이어진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는 말씀은 번역도 … 하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하는 등 멋대로 인 것처럼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지침서로 적용을 하려고 번역을 하기에 설명하기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바울의 말을 빙자하여 여러 가지 제목들로 어려운 부부들에게 날마다 부부싸움하고 사는 것보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움막에서라도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하여 공감은 얻을 수 있겠지만 전혀 본질과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우리 인생의 목적을 왜곡하고 미혹함으로 실족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장은 어렵더라도 출애굽해야 한다는 것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이는 곧 우리 인생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우리조각바람 지체들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몸소 허락해주신 모든 것을 신나게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 됨을 알고 멋있게 누리므로 행복한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