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오늘 묵상하는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고 기록이었으며
신약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이론은 가능하지만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인정한 후 이를 위하여 각자의 잔에 차 있는 율법이나 구습이나 자아인 도덕천을 완전히 비우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피조물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여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목적이요 사명이며 복중에 복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모로 보면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만 바라보며 실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너무나 흠모해온 말씀인 쉐마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이어진 말씀의 의미가
외모인 도덕천으로 보면 참으로 멋있고 당연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지표요 생명수 같은 말씀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부모와 같은 심정과 열정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함으로 구원을 가로막고 있음을 분명히 알 때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위 말씀의 의미는 우리 피조물 스스로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온전하고 완전하며 유일한 구원의 길인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임에도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모세는 구원의 길이 오직 율법밖에 알지 못하므로 육신의 부모들이 자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자녀를 젖으로 삶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모세가 생각한 유일한 구원의 길로 우리들을 이끌기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과 위협으로“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헛소리를 할 뿐 아니라
오늘은 복음에 무지함으로 불안한 모세가 출애굽기 34장 하나님 명령의 본질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에도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왜곡 변질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곱 족속의 진멸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미혹하여
이를 지키지 못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멸될 것이라는 것을 비롯하여 감언이설로 협박하며 자신의 말에 순종을 강요하고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행동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용감한 열정과 자신의 신앙 간증으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불가능에 도전하게 함으로 결국 도덕천의 젖으로 삶아 죽이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복인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받은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이 미혹하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때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빨리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믿음의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 손가락이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음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한 것으로
지금의 제도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난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등을 비롯하여
부부나 혈육의 관계와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등과 여러 가지 제도를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 도덕천에 따른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으로 곧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것을 누리는 삶으로 증인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율법의 완성이고 또 그것들이 손가락이 되어 가르친 것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확정된 구원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히 깨달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의 목적이 도덕천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그 예수를 우리가 사랑하기(살기) 위하여 일방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시는 평안이고, 구원받은 복을 누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복음에 무지함으로 도덕천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주신 도덕천인 율법과 혈연과 제도와 문화와 역사 등을 한계를 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누릴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깨달아 날마다 감사함으로 확정된 구원으로 소유한 복인 행복을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