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하려고 하니?
왜 결혼하려고 하니?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큰 일로 각인되어 결국 각자의 삶을 주관하게 하는 결혼에 대한 바르고 분명한 결혼관을 가져야 후회 없는 선택을 통하여 결혼을 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창세기 2장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는 왜곡된 표현을 바르게 표현하면 각각의 남녀가 자신의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이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지나 발악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온전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율법처럼 불가능의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둘이 하나가 되라는 율법인 결혼 대신에 신약인 복음을 주셨기에 이제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해야하는 우리 인생의 필수 사항이 아니라 우리들의 선택 사항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와 목적이 바르게 살기(행복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잘 살기(성공하기) 위함인지부터 먼저 분명하게 정의한 후 선택해야 후회 없는 결혼 생활을 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와 목적도 행복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성공하기 위함인지 같은 이유로 분명하게 정의한 후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선생들이 잘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처럼 성공한 삶이 행복한 삶처럼 미혹하는 말에 속아 오늘도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잘 살기 위함이면 세상이 말하고 있는 결혼 조건에 더욱더 충실해야 하며 이로써 행복을 누리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당연히 멈추어야 하고
바르게 살기 위함이면 결혼은 그저 행복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세상이 말하는 모든 결혼 조건은 무조건 서로 사랑함의 후 순위가 되어야 하기에 불효를 비롯하여 도덕적이지 못한 삶의 모양이 나타날 수 있기에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모습처럼 보일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모가 바르게 살기처럼 불효와 도덕적이지 못한 삶의 모양이 되어도 그 목적이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공하기 위함이면 절대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따라서 잘 사는 삶인 성공은 외모로 판단하고 바르게 사는 삶인 행복은 공의로 판단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때
죽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여 결국 성공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미혹하여 강요하고 있지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보면 그 모든 유혹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왜곡된 표현이라고 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여자는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미 성숙한 인간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