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오늘 묵상하는 창세기7장13~24절 말씀 중에서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알고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창세기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천국을 완성해 놓고 1:2절부터 3장까지로 일차 설명한 후 다시 4장 이후의 모든 성경 말씀으로 그 완성되어 진 과정과 완성한 이유와 목적을 우리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함으로 듣고 깨달아 구원을 받으라는 것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교세인 삯꾼 선생들의 말처럼 성경은 이미 완성된 지난 역사의 설명이고 오직 요한 계시록만이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계획처럼 본질을 미혹하여 천국을 소유할 구원받은 자가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참담한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성경이 보여주는 사실을 믿고 즉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살아있는 실제 상황으로 우리 각자에게는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실제 상황인 기회요 복된 소식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인 행복을 누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요 기록 같지만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 된 것은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한 것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자신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절대로 온전한 이성과 감성을 가질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결국 구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 행하므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신약은 복음을 통한 구원의 첫 번째 조건으로 율법인 도덕천이나 혈연을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며
이것이 또한 마태복음11장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뿐 아니라
복음이란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우리 피조물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므로 우리는 그저 회개하고 그 사실을 믿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믿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완성된 구원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목적이요 사명이지만 이 역시 신기루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누릴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 때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율법에 따른 외모인 도덕천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실족하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와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사용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초지일관 우리 피조물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회개를 통하여 복음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아 누리라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에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용할 뿐 아니라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가인과 아벨(셋),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열한지파와 유다 지파,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열한제자와 가룟 유다처럼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의 잣대인 선악과 죄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과
인자인 예수를 비롯하여 율법인 도덕천에 따른 피조물의 한계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모든 불의와 불법을 복음의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할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이고 은혜인지 분명하게 깨달아 감사함으로 신나게 누릴 수 있도록 성경을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딤후16장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분명하게 말해놓고 다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을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미혹할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과 아직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도덕천에 따라 판단함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극복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강요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법과 규례로 가로수를 만들어 그것을 길처럼 미혹하며
성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등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의 예수는 외모인 도덕천에 따른 선악의 잣대로 판단한 복과 저주를 좌우 가로수로 사용한 오직 믿음으로만 보이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도덕천인 외모에 따라 우리들이 바른 길로 인식하고 있는 혼자나 공동체로나 다 갈 수 있는 길로 눈에 보여 진짜 같지만 사실은 신기루인 허상의 기성복 같은 그런 길이 아니라
걸어감으로 누리기 전에는 즉 서로 사랑하기 전에는 절대로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모든 조건에 가장 잘 맞는 맞춤복 같은 길로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혼자나 공동으로나 절대로 갈 수 없는 유일하고 온전한 구원의 길일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나와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를 옮기지 않는 것이기에 부모나 선생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하여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결국 함께 실족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
예수님의 경고처럼 선생이 아니라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알 때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너무나 멋진 증인의 삶을 신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여주신 창세기 1~3절 말씀의 묵상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생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초 환경을 만드신 후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고 특별히 새로운 피조물인 이데아가 될 수 있는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은 동산 중앙에 구별되어 있는 선악과 생명나무처럼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선악과를 먹으면 벌거벗으면 부끄럽게 되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오히려 죽게 되는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후
이를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아 이미 완성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길 바라고 이 때를 기다리기 위하여 가족 옷을 입혀 주셨을 뿐 아니라
유혹의 실체가 볼품없는 것임을 보여주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진흙탕 싸움을 하겠지만 결국 유혹을 이기고 온전하게 승리하는 길이 있다는 소망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을 깨달아 회개하기보다 스스로 그 승리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믿기보다 스스로 힘으로 영원하기 위하기 자녀를 낳았으며 또 외모로 보면 한 몸인 아담과 하와가 온전한 한 몸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형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족하여 한 몸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삯꾼들이 소설을 쓰듯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는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고 말고 한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생각에 따른 것으로 이것이 바로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유혹으로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시며 유혹에서 벗어나길 바라셨지만 오히려 벗어나 하나가 되기보다 그 부모가 선악과를 따먹듯이 동생을 죽임으로 가인과 아벨이 영생을 소유하기 위한 제물드림의 작전이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족 옷을 입히듯이 죽임을 면하는 표를 주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 때 우리는 예배니, 제물이니, 정성이니, 뭐니 하면서 답 없는 헛소리를 하기보다 도구로 보여준 제물을 비롯하여 가인이나 아벨의 길인 유혹의 머리를 상하게 하며 유일한 생명의 길인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영생에 도전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 먹기를 실패하듯이 가인과 아벨의 뇌물공세인 제물 드림의 작전이 실패하자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성을 쌓고 아들을 낳으므로 다시 불가능의 도전을 계속할 뿐 아니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고 자책을 고백하게 함으로 가인의 계보는 악의 축으로 부각하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서 제물드림에 대한 스스로의 착각으로 실패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자신들이 임으로 낳은 아들 셋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착각함으로 역시 실패의 길을 가고 있음에도 이를 율법을 받은 모세가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를 선의 축으로 부각하여 기록함으로
성령으로 오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의 계보를 따라 오심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엉터리 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성경은 감동으로 보여준 하나님을 뜻을 율법인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기록하였기에 성령님의 도움으로 복음인 공의로 판단하여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바르고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는 연결상 어색한 이 말씀의 의미도 그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의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며 본격적으로 불가능의 도전을 계속했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고 살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더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도 도덕천에 따른 판단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인 도덕천의 판단에 따라 선하고 착한 모범적인 삶을 살았기에 예수님처럼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그렇게 미화하여 표현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가는 모습을 두고 번성하기 시작한다고 말하며 더 번성하기 위하여 선의 계보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도덕천에 따라 스스로 명분을 세우고 여자를 사람의 딸이라고 무시하면서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를 삼는 무례함을 정당화하며 회개보다 더 강한 불가능의 도전을 계속하자
그것이 유혹이고 불가능의 도전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영생을 소유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수명을 백이십 년 정도로 단축했을 뿐 아니라 악의 계보 아들들을 네피림이라고 하며 땅의 아들로 무시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인의 계보가 이 세상의 과학과 기술과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것처럼 그들이 용사며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한 왕성한 자녀의 생산을 번성했다고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에 악이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하실 뿐 아니라
이를 두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근심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를 모르고 불가능의 도전인 자녀 생산을 계속함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결혼도 하나님의 절대 명령이 아니고 자녀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순종의 표시이며
또 노아의 홍수 사건도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불가능의 도전을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라는 하나님의 뜻의 본질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의 표시이고 사역의 과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노아도 남들처럼 셈과 함과 야벳을 낳고 그들을 장가보내며 살고 있었다는 것은 에녹처럼 도덕천에 따른 판단일 뿐 아니라
노아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회개보다 불가능의 도전을 계속하고 있기에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고 하시며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며
또 노아 아내나 아들 그리고 며느리가 의인이라 선택을 받았다는 표시가 어디에도 없음에도 선택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선택된 동물도 선택 받지 못한 동물보다 특별한 선택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노아가 아담이고 가인과 아벨이며 바로 나와 너로 누구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으로 눈에 보이는 외모인 그림보다 그 중심 메시지인 본질에 집중할 때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는 말씀도 저자가 도덕천을 따라 노아의 선택을 미화하여 포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기록된 말이 사실이면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노아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노아를 본받으라고 하면 될 뿐 아니라 이전의 아담이나 셋이나 에녹으로 벌써 끝낼 수도 있었고 또 이후에도 모세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회가 있었으며 결국 복음인 예수도 그 중 하나가 되니 모두가 참으로 어이없는 괜한 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에게 직접 동물 선택권을 부여하여 당신 앞으로 데려 오라고 해놓고 실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이 말한 대로 노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방주로 들어가게 함으로 공정한 심판의 잣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나
또 오늘 보여 주시는 그림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에 다 들어가자 직접 문을 닫으시고 비를 내려 땅 위에 호흡 있는 모든 생물을 진멸하시고 오직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생명만 남겨둔 것도 잠시의 시간을 연장하는 도구요 외모인 방주를 부각하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하게 분별할 때
보여주시는 모든 것이 도덕천에 따른 심판이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이루어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회개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사역을 위한 과정임을 분명하게 깨달아 받은 구원을 감사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은혜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복인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은혜로 받아 확증된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이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때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빨리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 손가락이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음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한 것으로
지금의 제도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난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등을 비롯하여
인자의 예수나 부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등과 여러 가지 제도를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 도덕천에 따른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으로 곧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것을 누리는 삶으로 증인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율법의 완성이고 또 그것들이 손가락이 되어 가르친 것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확정된 구원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히 깨달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의 목적이 도덕천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그 예수를 우리가 사랑하기(살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시는 평안이고, 구원받은 복을 누리는 행복임을 분명히 알아야
복음에 무지함으로 도덕천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주신 인자인 예수와 도덕천인 율법과 혈연과 제도와 문화와 역사 등을 한계를 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확인하고 누릴 때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깨달아 날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으로 확정된 구원을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