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패스라 2011. 10. 25. 10:40

오늘 묵상하는 에베소서21~10절 말씀 중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고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이를 분별하기 위하여 오늘 보여주시는 그림을 보면 죽음이 바로 피조물의 한계에 의한 것임에도 허물과 죄에 의한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착각하여 죄로 분별하여 절대 불가능한 방법인 선과 악으로 나누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을 은혜로 받았다고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선물일 뿐 아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한 일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우리의 행위를 절대 불가능한 선에 맞추려고 하니

 

바울의 주장대로면 은혜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토장이고 우리는 진흙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헛소리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경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완성해 놓고 그 완성되어진 과정과 완성한 이유와 목적을 우리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함으로 듣고 깨달아 구원을 받아 그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라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복의 본질인 복음을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 각자에게는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위한 실재 상황임을 바로 알 때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원죄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그 원죄를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나 기록이 아니라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것은 구약이 말하는 본질이 죄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그냥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함으로

 

피조물 스스로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에덴 동산에 선악과 생명나무가 있듯이 피조물의 한계를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고

 

자유의지에 따라 회개한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여 착하고 의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겠다는 것이기에 율법인 도덕천이나 혈연을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저 구원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절대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님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약은 피조물이 구약의 본질을 깨달아 회개하고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그것을 은혜로 소유하게 해 주겠다는 것으로 이를 복음이라 하고 이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구원이라 하며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면 그 구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새로운 계약으로 이를 신약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신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임을 바로 알 때

 

마태복음11장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도 이를 두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조물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신기루요 허상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 온전함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며 이를 위하여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구원과 천국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를 소망이라 하고

 

피조물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아직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 있는 신기루인 이 땅에서는 믿음으로 밖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밖에 없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한 것이며

 

신약인 새로운 약속을 따라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인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해야 가능하지만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믿음 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므로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고 행복하게 잘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두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한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명령하고 또 강조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경의 외모로 이 세상을 위한 도덕천의 판단으로 모범이 되는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이 세상에 성공한 영웅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복음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사명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의 외모에 따른 사랑의 조건과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발악하다 실족하고 있음을 바로 알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복음을 가르치는 도구인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피조물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게 누리는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바로 알뿐 아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을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가인과 아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열한지파와 유다 지파,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열한제자와 가룟 유다처럼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의 잣대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바울은 딤후3장에서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즉 성경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라는 의미를 조금 부족하지만 잘 말해놓고

 

다시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이 이 세상의 유익과 도덕천을 위한 것처럼 미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과 아직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모인 도덕천에 따라 판단함으로 입으로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제사나 예배나 기도나 헌금을 비롯하여 착하고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여 강요함으로 자신의 배와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구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복음의 예수는 각자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길로 우리들이 길로 인식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고정된 길인 율법이나 규례처럼 죽어있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그것이 바른 길이 되는 살아있는 길로 외모로 보면 길이 없고 아닌 것 같지만 도덕이나 이성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다 길이 됨을 깨달아 알 때

 

우리들이 살아있는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할 때만 가능함을 알 수 있으며 또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너와 나의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이 없는 것이기에 옮기지 않는 것이 됨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울처럼 서로에게 부모나 선생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하여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결국 함께 실족하여 죽자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경고처럼 선생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 뿐 아니라 받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며 가장 비슷하게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이 되므로 신나고 행복하여 날마다 감사하며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증거하며 또 그 동안 우리들의 미혹된 사실들을 깨워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창세기 말씀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던 원죄의 논리는 도덕천인 외모에 따라 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한 것으로 복음의 첫 단추부터 잘못된 너무나 심각한 오류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의 죽음은 바울을 비롯하여 목교세들이 말하는 원죄를 비롯하여 죄의 결과가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당연히 죽는 것이기에 원죄라고 미혹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유혹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우리 피조물은 그 선악과를 먹고 그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피조물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고

 

선악과는 허락하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피조물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피조물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영생할 수 없다는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은혜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게 구원해 주겠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의 참 복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회개하기보다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자유의지를 따라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녀를 낳기 시작하고 이 세상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그것이 복처럼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복의 제목들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도전인 불의와 불법임을 바로 알 때

 

외모로 보이는 성경 기록이 스스로 모순 속에 빠져 있음이 오히려 당연할 뿐 아니라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선과 악을 가로수로 사용하여 고정된 죽은 길을 만들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지만

 

야보고서 1장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에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복의 본질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에 피조물의 착하고 선한 도덕적인 어떠한 행위도 절대로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인정하는 회개를 한 후 예수를 영접할 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셋이 아들을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천으로 말하고 있는 나의 하나님인 이 세상의 유혹이고 우상임을 바로 알 때

 

아브람 자체가 복이나 복의 근원이 절대 아닐 뿐 아니라 허락한다는 복의 제목들을 비롯하여 결혼이나 자녀도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에 뜻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불의와 불법임에도 복으로 착각하여 갈망하기에 복인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바로 알 아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공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요셉의 실체도 이 세상의 이치와 유익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명철하고 지혜로워 그렇게 된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에

 

그런 요셉이 한 일의 결과는 애굽의 번영과 애굽 신의 입지를 더욱더 탄탄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요셉 자신의 부모 형제를 430년의 노예생활로 이끈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으로 이 세상의 유혹일 뿐 아니라 주겠다고 하는 복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인 구원이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의 자랑으로 유혹이며

 

약속한 가나안 땅도 천국의 예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성공으로 외모가 너무 멋이고 대단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가나안에 입성한 그들의 삶을 통해서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기록의 대부분은 결과를 두고 이 세상의 관점인 외모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외모가 아닌 공의로 다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직접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됨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는 경고 말씀의 의미도 감사하게 받을 수 있고

 

또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다르게 생각함으로 대단한 역할을 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는 스트브 잡스가 우리들을 컴퓨터나 스마트 폰의 노예로 만든 것처럼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으로 구원하려고 한 아브람은 복의 노예로, 율법으로 구원하려고 한 모세는 율법의 노예로, 복음으로 구원하려고 한 바울은 복음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그들의 이름을 빙자한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은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정의와 착함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히려 그것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이 세상의 영웅호걸들은 때를 잘 만나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잠시 성공한 것일 뿐이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구원을 소유하여 누린 증인의 삶이 아니기에

 

사도행정4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실 뿐 아니라 또 로마서 310절에서도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인 복음에 무지하여 유혹인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신기루를 잡으려고 열심히 달려감으로 성공처럼 보이거나, 그러다 지쳐 그 유혹의 요구를 외면하려고 스스로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우울 속에 빠지거나 또는 포기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다 신기루 같은 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보들의 행진으로 그 마지막은 언제나 영원한 멸망뿐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과거의 틀이나 오류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살아있는 도움으로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바로 알뿐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게 증인의 삶을 누리므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은 우리들의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음을 바로 알면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지 않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다가 때가 지난 후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감사하며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으로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는 증인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사역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이므로 착각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본질처럼 착각하여 바울의 요구에 따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신기루인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하는 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직 바울의 주장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여 구원을 이룰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도 없기에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아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인 너무나 감사한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고 누리는 증인의 삶을 행복하게 누리며 살아야 함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신기루로 헛된 이 세상의 정의와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처럼 미혹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하는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몸인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초대 교회가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바로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율법의 성전, 제사장,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희년 등을 비롯하여

 

십자가의 고난이나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나 여러 가지 법과 제도는 절대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아님을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을 전부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만 사랑하기에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완성해 놓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한 성경기자의 기록인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기록된 문자에 미혹되어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하나님을 빙자하여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며 이로써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심각한 불의와 불법임을 바로 알 때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신약으로

 

이는 곧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도와 선교가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당연한 사명이 절대로 아니라 어디에 있던지 현재 있는 위치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누리는 증인이 되리라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며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날마다 확인하는 살아있는 길로 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실체와 본질로 이미 지난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현재와 미래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우리는 항상 깨어 있으므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스스로 점검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마땅한 사명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이 말하는 외모인 사랑의 조건에 미혹되어 시기하고 질투하며 또 과거에 메여 피었다 시들어버리는 꽃이 되는 자아의 유혹에 빠져 신기루인 이 세상으로 달려 가는 자신의 빨리 발견하고

 

신약인 새로운 피조물의 마땅한 사명을 위하여 돌이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자신을 부인해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경고처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고 누리는 증인의 삶이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것일 뿐 아니라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 따라 사는 것으로

 

결국 외모에 따른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할 때만이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현실이 되어 태산같이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우리의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감사하며 날마다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으로 신나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