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오늘 묵상하는 야고보서 4장1~17절 말씀 중에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복음으로 복음이 되므로 신기루 피조물에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거나 후회하기보다 너무나 감사한 절대 불가능의 과정을 통과한 충격적인 변화요 감동임을 잘 알아
그렇게 됨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확인하고 신나게 누리는 행복한 삶을 위하여 서로 발을 씻기며 서로 사랑하는 구원받은 천국증인들이 어떻게 신기루인 이세상을 살아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이미 묵상한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기보다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생을 소유하기 위하여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며 스스로 예수의 종이 되어 여호와로 착각한 도덕천과 표적인 예수의 은혜에 복과 평강을 비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가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이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주겠다는 신기루 평안인 불안과 구속임에도 복음의 무지로 복으로 착각하여 스스로를 속이며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표적을 구하게 함으로 이단인 교회가 되어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에 걸림돌이 되는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려고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결국 온전한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고 어제 묵상을 다시 정리해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가르치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며 사도로 택함 받았음을 감사하는 이성적으로 긍정적인 바울과는 달리 온전하지 못한 피조물의 사도 직에 감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이는 야고보를 보여주며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는 그림처럼 야고보 스스로 부정적이 된 이유를 이성적인 바울과는 다른 각도인 감성적으로 우리 피조물을 보고 판단한 것으로 그 외모는 우리가 말하는 복음의 회개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중심은 회개가 아니라 극복할 수 없는 높은 벽 앞에서 자포자기 하는 모습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는 그림이나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는 그림처럼
말이나 배를 비롯하여 인간 외에는 재갈이나 키로 표현된 이성의 통제로 순종과 복종이 가능하지만 사람의 혀로 표현된 피조물의 자유의지인 감성은 이성의 통제로 온전한 순종과 복종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그림이나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는 그림처럼 이성으로 통제뿐 아니라 이해가 절대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는 그림은 바울의 주장처럼 입으로만 믿는다는 자기의 확신이나 신념은 부질없는 허황된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 먼저 입보다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는 그림은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그로 인하여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여호와의 뜻인 복음도 아니고 오히려 악한 짓이라고 하면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 굴레 씌우리라”는 그림이
온전하신 여호와와 복음을 모르는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한 것으로 바울과 히브리서의 주장이 허황된 것임을 반증하고 있지만 야고보 주장 역시 바울의 주장으로 인하여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야고보와 바울은 주장인 그들의 복음은 증인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종교이지만 사람들이 그린 용처럼 그 방법은 서로 다른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둘 다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의 이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보여주시는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는 그림은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말한 것처럼
스스로의 답이 없는 너무나 높고 깊은 수령에 빠진 야고보는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해도 바울처럼 상대방이 이해하고 받아주기 보다 오히려 다른 뜻으로 드러나자 약대의 무릎을 가진 사람이란 별명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 판단한 행함인 기도로 그 답을 찾기 위하여 발악한 안타까운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총회 초대 의장으로서, 바울이나 히브리서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강력하게 표적을 구하기보다 감성적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충족되지 못하므로 십자가, 부활, 성령 등의 승리의 말은 한마디 못하면서도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에 더 집착하므로 바울은 이성적으로 야고보는 감성적으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이단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는 그림처럼 스스로 만족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복음을 그리며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는 그림처럼 복음과 전혀 무관한 헛소리를 신기로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바울처럼 논리적이지도 못한 자신감 없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어설픈 똥칠을 할 뿐 아니라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는 그림처럼 바울처럼 믿기보다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려 추락하면서도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며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는 그림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는 바울의 주장과는 달리 전도도 의미 없는 헛된 신기루임을 주장할 뿐 아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는 그림처럼 바울의 전도 주장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하나님을 믿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으로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주장도 바울의 주장처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타깝게 들려오지만
문제는 바울이나 야고보 둘 다 온전하신 여호와와 온전한 복음에 대한 무지로 회개함으로 여호와께서 우리 피조물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복음으로 자유의지인 감성과 이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기보다 이성이나 감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하나를 소멸하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불의와 불법으로 당연히 실족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소망인 참이고 진리인 영생을 소유하기 위하여 철학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했으며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신기루처럼 살아질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허상일 뿐 아니라 영생을 소유하게 하려는 여호와의 뜻인 복음은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피조물 스스로는 그 자체를 절대로 알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라고 하시며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달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을 만들어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를 비롯하여 모든 도구인 몽학 선생들을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로 자신을 부인함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잔을 비우면 누구든지 복음으로 복음이 됨으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근본적으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과 선악과로 표현된 이성의 온전한 조화이며 그렇게 서로 사랑하므로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게 되므로 그것으로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연수까지 행복하게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피조물의 이성을 따라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도구로 만든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방해가 되는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1차 도전한 것이 구약으로 바로 이단의 시발점이고
구약인 1차 도전이 불가능하자 회개를 하기보다 다시 2차 도전을 위하여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됨으로 복음의 초대 증인이요 최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2차 도전이 신약으로 오히려 수많은 이단들의 출현에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과 온전하신 여호와에 대한 무지로 여호와께서 스스로 구약과 신약을 주고, 아론과 멜기세덱의 대를 잇는 두 라인의 제사장 직을 주고, 성소라는 이름으로 이땅에 천국 모형을 주고, 이 땅과 천국에도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적인 이런 참담한 주장들은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온전하신 여호와를 폄훼하며 온전한 복음으로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표적을 구하게 함으로 자신들은 물론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불의와 불법의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채운 너무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랑스런 자신의 잔이거나 반대로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한 자신의 잔을 비롯하여 어떤 모양이고 조건이든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피조물의 잔은 신기루인 헛된 것으로 이를 비우는 회개를 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구약과 신약으로 멋대로 분별하여 복음을 그리므로 지금까지 이단이 되고 몽학 선생이 되어 한편으로는 복음으로 안내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게 하는 예수를 비롯하여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삼위 일체, 율법, 십자가, 성찬, 세례, 동정녀, 성령잉태, 원죄, 제사장, 제자, 기도, 예배, 찬양 등을 비롯하여
복음을 가로막아 표적이 되는 몽학 선생의 옷을 한 겹씩 모두 벗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 다시 표적을 구하므로 성령훼방을 하기보다 서로 사랑함으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