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지금까지의 묵상과 무엇을 바라거나 후회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충만하여 행복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모든 것에 우선하여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는 모세의 질문처럼 여호와에 대하여 분명하게 바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여호와께서 직접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며 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셨다고 기록해 놓고 있고 이를 철학에서 이데아 또는 본질이나 원본이라고 하는 것으로 불생불멸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영생불멸의 온전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란 말로 시작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표현하여 기록한 이유와 목적에는 많은 비밀이 숨어 있기에 피조물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의 것으로는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인 새로운 피조물은 참인 복음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도 없고 또 피조물이 이해할 수도 없기에 그냥 천국이란 비유로 설명한 것처럼 비유로 표현하여 기록한 것으로 바로 알 때
성경의 본질은 스스로 계신 여호와께서 태초인 어느 날 새로운 피조물을 위하여 피조물 아담을 만들어 그 아담이 당신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로 거듭남을 보여주시며 또한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파생된 피조물은 어느 누구라도 그 복을 받아 예수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것이 복음으로
그 복음의 실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피조물인 사람 아담이 여호와의 뜻을 따라 스스로 온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내제된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려고 열심히 도전 했지만 절대 불가능하자
하와를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아담 안에 내제된 이성과 감성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하여 서로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거듭나는 도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 많은 유혹과 역경의 도전을 통하여 결국은 솔로몬 같은 지혜로 피조물의 한계와 스스로 계신 여호와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로 거듭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란 비유로 표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무지한 피조물인 성경 기자들은 이 비유를 참으로 착각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외모로 판단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본질을 미혹할 뿐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고 참을 가리는 똥칠을 하며
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기록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는 기록을 함께하여
비유로 설명한 이유가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아니면 피조물을 어떤 자격과 조건으로 분별하기 위함인지 미혹하여 지금까지 똑 같은 피조물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별하는 것처럼 이세상을 선과 악 등으로 분별하여 종교를 만들고 선생이 됨으로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로 참인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는 말씀의 표현도 비유로 그 의미는 이미 완성했다는 것과 아직 완성 중이란 의미가 함께 포함된 것과,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온전하신 여호와이시기에 이미 완성된 것을 영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피조물 아담으로 출발하여 솔로몬을 거치면서 결국 새로운 피조물 예수로 거듭난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또 완성 중이란 것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파생된 피조물인 나의 구원이 새로운 피조물 예수를 증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을 분명하게 바로 알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기에 외모인 이성으로 보고 판단하여 표현한 비유가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기록한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여호와의 분명한 뜻인 복음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으로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비유로 된 기록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는 비유로 된 기록이 증거하고 있는데
이로써 태초에 여호와께서 피조물을 새로운 피조물로 스스로 거듭나게 하셨다는 표현은 이성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표현하면 새로운 피조물의 온전함의 본질에 문제가 있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에 무지한 피조물 성경 기자가 천지창조를 참인 것처럼 너무나 대단하게 묘사하여 표현함으로 천지창조가 여호와를 여호와답게 하는 참으로 착각하여 지금까지 미혹하여 세뇌하고 있었지만 천지 창조는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때까지 필요한 도구로 만든 것이지 참인 본질이 아님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그렇게 때문에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파생된 피조물인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즉 천지 창조물 스스로 그 수명을 다하는 그날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조물인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여호와의 뜻처럼,
또 아담과 하와가 버린 에덴동산을 천국처럼, 온전한 새로운 피조물로 완성되는 축제와 감사의 그날을 참혹한 심판과 종말의 날로 미혹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을 소멸하며 신기루 도덕천을 표적을 구하도록 세뇌하는 이 세상과 종교는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라고 부모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선생들을 통하여 정의나 선의 이름으로 신기루처럼 헛되고 헛된 수많은 이성과 감성을 세뇌하여 자신은 물론 정말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새로운 피조물을 빙자하여 오히려 돌연변이 괴물을 만드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가능한 것처럼 미혹하는 절대 불가능의 엉터리 쇼에 현혹되어 불평과 갈급함으로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보다 외부의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행복 자체인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명심하고
말씀을 묵상해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비유의 표현은 스스로 온전하신 여호와나 새로운 피조물은 외부의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비유의 표현은 천지 창조가 없는 태초의 상태에서는 피조물이 살 수 없기에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때까지 살 수 있는 필요한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완성했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비유의 표현은 온전하신 여호와 당신처럼 외부의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원한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듯이 복음과 온전하신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로 외모로 판단하여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도구인 천지창조를 여호와의 뜻이나 목적인 참으로 착각한 심각한 오류로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는 그림처럼 이를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직원이나 청지기처럼 고용하듯이 피조물 아담을 창조한 것으로 미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는 그림처럼 머슴에게 수학의 일부를 품삯으로 주듯이 피조물 아담에게 천지창조의 일부를 품삯으로 주는 것처럼 미혹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사실처럼 주객을 전도하여 미혹하고 있지만 만약 이런 무지한 엉터리 주장이 사실이면 오히려 천지를 창조하고 “심히 좋았더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피조물 아담을 만들고 “심히 좋았더라”고 한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피조물 아담이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로 스스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으로
이를 요한 복음서에는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비유의 표현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복음의 실상을 영화처럼 다 보여주었다는 뜻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는 비유의 표현을 참으로 착각하여 표현된 문자대로 바로 보면
아버지나 아빠 하나님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태초에 이미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스스로 거듭난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온전하신 여호와와 복음에 대한 무지로 오히려 안식을 한다고 표현함으로 온전하신 여호와께서 피조물처럼 안식을 필요한 것으로 폄훼하는 것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는 비유의 표현도 피조물 아담이 새로운 피조물 예수로 스스로 변화되어 거듭남으로 영생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 자체가 된 것을 표현한 것임에도 여호와께서 직접 해주신 것처럼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표현된 문자대로 참으로 착각하는 것은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처럼 여호와와 복음의 무지로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을 분별하지 못한 심각한 오류가 될 뿐 아니라
온전하신 여호와를 온전하게 영광되게 높이는 말이 아니라 천지창조나 피조물 아담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그냥 만들면 될 것을 괜한 억지 쇼를 한 것처럼 온전함을 손상하며 폄훼하는 것이 됨으로 바로 알 때
앞으로 이어질 모든 그림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비유의 표현처럼 시간과 공감을 초월하시기에 이미 완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현실처럼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하여 보여주시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여호와께서 만든 피조물로 사람인 아담이 온전하신 여호와의 뜻을 따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스스로 거듭나기 위하여 이성인 남자 아담과 감성인 여자 하와로 분리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의 도전 끝에
결국 솔로몬 같은 지혜를 얻게 되어 온전하신 여호와와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 예수로 스스로 거듭나는 과정의 실상을 영화처럼 보여주는 것이지만
피조물의 한계로 그 사실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달을 수 없기에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로 절대 불가능하고 오직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깨달아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하기보다
회개하고 복음으로 무엇을 바라거나 후회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충만하여 행복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오직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릴 때 만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이심전심으로 주인공인 새로운 피조물 예수처럼 내가 바로 현실의 예수가 되어짐을 확인하고 믿을 수 있기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비유로 표현된 것처럼 아직 미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표현된 비유처럼 피조물로서는 필요한 도구 없이 절대로 자생할 수 없는 끝이 없는 우주공간을 여호와처럼 고요한 호수 위를 거닐듯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상이나 꿈처럼 다가올 때
아직 미완의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표현된 비유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므로 그 사실을 확증하고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 않고, 놀라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나 스스로 만든 표적의 유혹에 넘어져 회개함으로 이미 부인한 신기루 같은 자신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비유처럼 다시 찾아 붙잡고 교묘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기루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은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려고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성령훼방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묵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는 종교의 절기나 기념일은 참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 오직 표적을 구하고 있는 종교를 위한 것이고, 개인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스스로 온전하지 못하여 이런 저런 의미를 부여하여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고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려는 것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만약 구호대로 성탄을 가족과 함께하면 이웃이 소외되고, 이웃과 함께 하면 가족이 소외되기에 모두가 함께 잘 자는 사회의 구호처럼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론이나 형식으로만 가능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하려고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짓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은 절대로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