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自殺)의 실체
사전적 의미의 자살은 당사자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로 정의함으로 결국 그 외모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성경에서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의 모습처럼 될 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그 원인과 이유에 상관없이 또 그 실상도 회개나 포기나 상관없이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따른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성경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하는 것처럼 그 인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면 미완성의 인생이기에 동정과 연민을 보내며 애통해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기법을 따른 윤회나, 전생과 현생과 내생으로 분별하며 불국정토를 말하는 불교를 비롯하여 하나님 나라인 천국과 지옥을 분별하는 기도교의 논리 등 종교가 말하는 인생론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온전함의 논리를 따른 자살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포기한 미완의 인생으로 착각하기에 자살을 막기 위하여 발악하고 있지만 점점 더 자살이 보편화되어 자살 사이트가 생기는 등 의술과 질병, 과학 기술과 행복처럼 영원히 평행선을 긋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병의 원인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자살의 실체를 바로 알기 위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피조물은 죽을 수 밖에 즉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여 여호와처럼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 위하여 피조물의 본능을 따라 언제 어디서나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하여 발악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과
자살한 당사자만 미완성의 인생이 아니라 우리들이 말하는 천수나 장수를 누린 자를 비롯하여 어떠한 피조물도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태초부터 감추인 것처럼 보이는 정답인 복음 즉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면 모두가 미완성의 인생이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우리 인생의 정답인 복음과 자살에 대한 무지로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표적을 구하고 있는 부모를 비롯하여 종교나 이 세상 선생들의 무지에 따른 착각으로 이 세상이나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과 감성으로 세뇌하므로 괴물이 되어 자살을 포기나 연민이나 동정이나 복수를 하는 도구로 착각하게 함으로
자신은 물론 주변을 괴롭게 하므로 본능적으로 갈망하지만 알지 못하고 있는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헛되고 헛된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회개함으로 영생불멸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멋진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당사자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살기 위한 도전이요 적극적인 발악임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알지 못하는 부모나 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 선생들의 유혹에 미혹되어 나를 부인하는 회개를 하기보다 나를 포기하는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을 방지하려면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으로 판단하여 표적을 구하고 있는 지금의 방법이 아니라 지혜의 왕 솔로몬의 고백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헛되고 헛된 신기루임을 바로 알게 함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처럼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힘들게 하는 그 주변을 진멸하는 회개를 함으로
영생불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본능적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