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깨달음의 실체

패스라 2013. 6. 3. 09:59

불교에서는 피조물을 비롯하여 피조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태어난 후 늙어가며 병들어 죽는다는 유생물의 생로병사와, 생겨나 머물며 변화되다 소멸한다는 무생물의 생주이멸이나 성주괴공의 논리를 따라 연기하므로 무상 또는 무아라고 말하며

 

또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진리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인연들이 수천억겹 쌓여 부부나, 부모나, 자녀의 인연으로 태어난다고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연기법의 이름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관통하는라는 실체인 자성에 대한 생로병사의 설명이나, 생로병사의 굴레를 해탈한 최고 경지의 여여한 삶의 주체로 말하고 있는 성불한 부처의 불생불멸의 논리나 주장은

 

제법 실상은 공 하다는 논리의 주장이나, 생기소멸의 법칙을 따른 연기법의 논리를 따라라는 실체인 자성이 사라지고 모두가라고 하지만가 아닌 큰 바다로 하나가 된는 바다나 바다의 본질이 아니라 바다를 형성하는 하나의 세포가 되는 것이기에 불교의 두 논리의 주장은 서로 상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생로병사의 굴레를 해탈한 행복의 주체로 말하고 있는 자성인 부처의 불생불멸 논리의 주장도 어느 누구도 그 온전한 그것을 소유하여 누리기보다 사람들이 상상의 용을 그리듯이 추정하여 각자 자신들의 믿음으로 확신한 것이기에 참인 실존과 실삶의 용이 아님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불교에서 깨달음의 최고 경지로 말하고 있는 여여의 모습은 생로병사인 고락의 굴레에서 해탈한 모습으로 결국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예수의 말이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하면서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고 하는 솔로몬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받아 들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누리기 원하는 피조물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갈망하는 목적과 사명을 위하여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여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불교를 비롯한 종교나 이세상의 말하는 논리나 주장에 미혹되어 같은 것처럼 온전한 평안함인 자유와 행복의 만족으로 착각하면

 

해탈하여 여여한 삶을 최고 경지로 착각하여 참선을 비롯하여 삼천배 등의 절이나 불경을 암송하는 등 온갖 제도나 방법으로 그 상태의 유지를 위하여 발악하고 있는 불교나, 세월의 흐름에 관계없이 변화 없는 죽은 내용의 설교로 평생을 우려먹는 목사들이나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는 베드로처럼 구원의 길에서 패망의 길로 갈아타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새로운 피조물의 여여한 삶은 불교처럼 고도의 수련이나 훈련으로 이성과 감성을 소멸하고 원하는 이성과 감성을 세뇌함으로 오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헛된 신기루인 이 세상에 대하여 피조물을 옷을 입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그냥 족한 것으로

 

결국 새로운 피조물인 정답을 소유함으로 오는 족함이지 지금 현실에 대한 만족이 아님으로 분명하게 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정답인 피조물의 의미가 점점 사라져 결국 패망의 길로 걸어가게 될 뿐 아니라

 

지금 현실의 만족은 편리함에 따른 꼼수의 만족으로 신기루나 바람처럼 살아져 가지만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오는 족함은 온전한 것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피조물의 옷을 벗는 것을 소망하며 그냥 현실을 족하며 누릴 수 있게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아들과 교대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문을 넘어 자신이 아니라 주변이나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무례하고 교만한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지 말라고 하면서

 

가게에 담배를 물고 담배를 사러 들어오거나, 구입한 담배를 개봉하며 나온 이물을 바닥에 버리거나,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비롯하여 돈을 주고 받거나, 주문의 방법 등 고객의 행동이 나의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나의 편리를 위하여 윤리 도덕과 예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고객을 가르치는 무례하고 교만한 불가능에 도전하므로

 

대가를 받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본 본문을 망각하고 고객과의 시시비비로 분쟁을 유발하는 것은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은 개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근무 요령은 나의 본분을 따라 지금 내가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경비나, 나의 편리를 즐기기 위하여 있는 쉼이나,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장사꾼 등으로 분명하게 분별하여 바로 인식할 때

 

만약 내가 장사꾼이면 나를 위하여 고객의 변화를 요구하는 교만한 무례함으로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내가 변화하여 오디오 볼륨을 최소한으로 유지 하는 등 고객의 구매 활동에 편리를 제공함으로 영업이익은 물론 나의 자존심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바로 여여한 삶의 모습이라며 위의 내용을 함께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