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실체
기억이란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저장하여 보관하는 것으로 결국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추억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거나 또는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실삶은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헛되고 헛된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실제 상황인 실삶이 아니라 우리들이 즐기고 있는 동영상이나, 입체영상물처럼 과학과 기술의 힘을 빌어 아무리 생명력이 넘치는 것처럼 조작하여 연출을 잘 한다고 해도 그 실삶은 사진이나 그림처럼 이미 죽은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그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거나,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것이 정답처럼 미혹하여 세뇌하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달콤한 유혹과 협박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며 수백 번을 강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교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 이세상의 모든 것도 여러 가지 법과 제도로 역사나, 고전이나 전통을 비롯하여 기억함에 의미를 부여하여 기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정답처럼 발악을 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와 목적은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과 사명을 따른 정답이 아니라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과 사명인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갈망을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한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기억을 선택하여 온갖 권모술수와 표리부동의 모습으로 정답으로 미혹함에 세뇌되어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억의 실삶을 보면 피조물의 그런 소망과는 달리 신기루로 헛된 이 세상에서는 참으로 유용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인생 무상이나,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하는 것처럼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결국 나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되고 헛된 의미 없는 짓이 됨을 바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기억은 현실의 실삶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신기루 그림자일 뿐 아니라 “그때 그랬으면 내가 좋았을 텐데”라는 것처럼 기억도 기억의 주체인 내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 기억으로 명명된 신기루인 내가 그저 기억하는 자의 편의를 따라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뜻인 복음의 무지로 기억하게 함으로 신기루인 기억 속에서 영생불멸 하려는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는 그림처럼 발악하는 선생들이 되어
이 세상은 물론 성경을 비롯하여 각종 종교의 경들은 충성과 순종의 이름으로 온갖 법과 규례를 만들어 정답처럼 기억하도록 강조하여 세뇌함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괴물을 만들기 위하여 예배, 기도, 찬송, 참선 등의 종교적인 행위나 이 세상의 성공을 빙자한 삼강오륜이나, 공부 등으로 기억하도록 발악을 하고 있지만
성경의 다른 면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거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할 뿐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여호와의 뜻으로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비우는 회개만이 유일한 정답이기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실삶으로 확인하며 영원히 누리는 것이 바로 그렇게 발악하여 기억됨으로 얻으려고 하는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되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