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1-11절 말씀으로 먼저 어제 묵상한 말씀 중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란 우리가 외면하든지 인정하든지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상관없이 우리 삶의 전반에 깊숙이 흐르며 때로는 우리의 피난처로 때로는 위협으로 우리를 주장하며 공존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 절대 피할 수 없는 마력이지만 이 죽음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결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설명한 말들은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보면 바울이 부모와 선생이 된 좋은 의미의 열정과 조급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례함이 되어 결국은 이런 영웅 같은 바울을 따라 가려고 하는 목교세들에 의하여 그들 스스로의 고백처럼 교회와 인생들이 썩어 그 악취가 온 세상을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최후 심판 날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고, 또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는 말의 실체가 참으로 애매하다.
도움 설명처럼 주님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소망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답게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기는 좋으나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불확실성의 연속으로 이것이 바로 가면을 쓰게 하여 지금의 목교세들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바울 스스로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고 하고는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여 오히려 혼미하게 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런 말에 미혹되지 말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었기에 주님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소망이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증인과 선생의 모습이 비슷하여 분별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생은 화가 있다고 경고 하시고 증인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오직 예수로 각각의 분량대로 온전해 져야지
그렇지 않고 그 대상이 바울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조물을 본받기 위하여 달려가면 내가 그가 아니므로 결국 부족할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율법 같은 틀을 만들어 무례를 범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려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죽은 자가 되어 실족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의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증언하는 것이지만 천제 증인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증인으로 결단하여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의로워져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율법에 온전히 거하므로 전지전능하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알아 온전하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그것이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인 당신의 몸을 우리 인생의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주신 복음은 결국 구약은 우리 피조물로서 그림이 떡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의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도구로 주신 부부나 혈연이나 재물이나 건강 등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착각하여 실패한 것임을 고백하고 도구를 도구로 인정하는 회개로 도구가 아닌 진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복음 즉 오직 예수로 구원을 받아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라는 것이다.
또한 이를 확인해 주기 위하여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온 혈연이나 족보를 비롯하여 도구의 중요성이 살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도구를 다 버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하나님의 뜻인 복을 평가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을 두고 천국의 배설물이 하나님의 뜻인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인 복이 아닌 배설물을 갈망하는 헛된 삶에 도전하게 된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분별하라고 주신 이성과 서로 사랑하려고 주신 감성의 조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의롭고 순결하고 착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 되신 후 그것을 믿음과 은혜로 받아 누리면 그것을 우리의 의와 순결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고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온 땅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죽여 그저 온 땅에 사랑의 시체들로 인하여 악취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만 진동을 하고 있으며
정말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죄의 권세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어 최후 승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지침서인 요한 계시록의 말씀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금기하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할 뿐 아니라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통과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주셨지만 이제는 이미 빈 껍질이 되어버린 제사(형식적인 예배), 성전(교회), 제사장(목사), 십일조, 율법(착하고, 구별된 순결한 삶)을 비롯하여 이 세상이 요구하는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매달리는 고난을 요구하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역을 폄하하는 것으로
에베소서 4장에 말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절대로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 말세의 기간을 견디어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를 극복하는 비밀이 바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천국과 이 세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며 서로 사랑하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이를 위하여 오늘 묵상 할 말씀 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자
최후 심판을 위해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고 하신 후
다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왜냐하면 최후 심판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해야 한다고 하고서 다시 그 최후 심판의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한 것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자면 안 된다는 것인가 자든지 깨든지 상관 없다는 것인가 참으로 애매하다.
그리고 피차 즉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면 안 된다는 것인가 자든지 깨든지 상관 없다는 것인가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므로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씀의 본질이 왜곡 변질되어 결국 오늘날과 같이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썩은 악취와 꽹과리 소리만 온 세상을 진동하여 사랑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바울이 표현한 깨어 있는 것과 자는 것이 구약시대처럼 율법으로 접근하거나 또는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접근하면 안되고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역을 통하여 완성하신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새로운 언약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불사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깨든지 자든지 즉 율법과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모습에 관계없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수 있게 구원이 완성된 것이고 이 사실을 잊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라는 즉 서로 발을 씻기며 사랑함으로 천제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증인과 선생의 모습이 비슷하여 분별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생은 화가 있다고 경고 하시고 증인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오직 예수로 각각의 분량대로 온전해 져야지
그렇지 않고 그 대상이 바울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조물을 본받기 위하여 달려가면 내가 그가 아니므로 결국 부족할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율법 같은 틀을 만들어 무례를 범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려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죽은 자가 되어 실족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의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증언하는 것이지만 천제 증인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증인으로 결단하여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리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또 다른 나 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종말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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