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요한복음12장12-25절 말씀 중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감사하며 이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묵상한 것처럼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은 율법이나 이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른 표적인 외모로 판단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으로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사명에 따라 영과 진리의 예배인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비롯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또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비롯하여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물음에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라고 하는 말씀과
또 너희 눈에 보이는 외모인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지만 사실 너희들이 보아 알고 있는 나의 외모와는 달리 나는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본체요 원본으로 참이신 그 분이 나를 보내었으며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고 하시는 것과
예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과
또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은
지금까지 피조물인 우리들이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는 그 복을 소유하기 위하여 날고 긴다는 수많은 철학자나 또 성경으로 보여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도전한 것 자체가 바로 표적인 외모를 쫓는 삶으로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었기에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한 것이며 이 절대 불가능의 현실을 극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공의롭게 판단하여 믿기보다 표적인 외모로 판단하기 위하여 이리 저리 맞추어보다 결국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또 음행한 여인을 끌고 와 돌로 차라고 한 율법인 외모를 근거로 판단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공의롭게 판단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한 사람도 돌로 칠 인생이 없는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살아있는 떡과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실 뿐 아니라 빛이 되시어 따르는 자는 어둠인 죄악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인 구원의 빛을 얻는다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표적인 외모를 쫓으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되기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는 말씀처럼 후회한다는 선언에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하시는 것처럼
마지막 기회를 잡아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하여 지금은 그 때가 차 오히려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고 이 세상의 유혹과 미혹의 잠에서 깨어나 천국 문이 닫치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소유하면(거하면)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피조물인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뿐 아니라 소유하게 되어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이며
또 너희들이 아브라함을 따른다고 하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고 하시면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고 하시며
공의롭게 판단하기보다 외모로 판단하는 불의와 불법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하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음과 또 그 방법도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불가능의 도전인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착함이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고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거듭난 자들이 은혜로 거저 받아 소유하면 됨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표적인 외모를 쫓아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며 피조물 아브라함을 붙잡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행하려고 한 그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일의 핵심이고 본질인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가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며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아비가 표적인 외모를 쫓아 행한 헛된 일들을 그대로 따라 아직도 그것이 참인 줄 알기에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고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하는 것을 비롯하여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진짜 답을 찾지 못하여 분쟁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고침을 입은 맹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물음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응답은 맹인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맹인 역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보다는 보지 못하는 눈을 밝히는 이 세상의 능력을 믿는 것으로 결국 표적인 외모를 취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맹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천국의 맹인을 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시며 피조물의 한계와 이로 인한 도전이 불가능의 도전이었음을 말하며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씀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는 말씀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시는 것이 우리들이 이미 묵상한 것처럼 십자가의 사역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너무나 중요한 말씀임에도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신성모독인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하는 것 때문이라고 하자 성경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묵상한 것처럼 지체끼리 서로 하나님이 된다고 한 것을 증거해 주시며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 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고 하는 것도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라고 하는 것처럼 요한이나 성경이 증거한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모든 것은 참이 아니기에 결국 표적인 외모를 쫓으면 안된다고 하시며
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형제를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도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시며 빛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들이 실족하지 않고 나사로를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우리들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 되게 하며 그 잠도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깨워 주실 수 있다고 하시며
이미 죽은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난다는 예수님의 말에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면서 죽은 이후의 부활을 이야기하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는 것은
목교세들의 복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무병장수를 비롯하여 부귀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겠다고 하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하였지만
마리아 역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하자 흘리시는 눈물은 믿음 없는 유대인들의 말처럼 그들의 향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도 본질을 깨달아 믿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따른 것임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다그침에 돌을 옮겨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나
또 이미 말씀 하신 것처럼 그렇게 되어갈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진행한 이유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둘러선 사람들이 마르다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여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처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말대로이면 정말 믿고 감사해야 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그들을 뜻을 위하여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불의와 불법을 합리화하여 자신들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며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베다니로 돌아오자 그 삼남매가 잔치를 배설 하는데 잔치 음식 등 일을 열심히 하는 마르다와 예수와 함께 자석에 앉아있는 나사로 그리고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는 마리아를 보여주시며 이 세가지 일을 우리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지만
제자 중 하나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표적인 외모를 따라 판단을 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랑이나 자기의 야욕과 욕망을 위한 것이 된다고 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처럼 마르다처럼 열심히 잔치 즉 이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문 즉 본질이 아니며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과 사명은 나사로나 마리아처럼 외모로 판단하면 지탄을 받아야 할 것처럼 보여도 오직 예수로 그 예수를 소유하여 동행하며 누리는 것이 바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보여주신 후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고 하는 것은 예수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임을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임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환영하는 이유는 나사로 건을 비롯하여 우리 눈에 보이지만 결국 사라질 표적인 외모에 있음을 고발하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는 이 말씀도 지금까지 세뇌된 것처럼 누구를 위한 희생이나 역할을 강요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각자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에게 해야 하는 것임을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는 말씀으로 보여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회개요 자기부인이며 외모가 아닌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임을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들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으로 평가하면 그것이 바로 또 다른 표적인 외모가 됨을 알고 공의로운 판단을 해야 예수님의 양이 되어 예수님의 음성을 들고 따르게 되는데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참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는 이 세상의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스스로의 행위로 의인에 되어 그 복을 누리겠다는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혼란과 혼돈과 고난 속으로 빠져 방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아직도 목교세들에게 미혹되어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표적인 외모로 판단하며 믿음 없어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확실하게 대답하며 갈까 말까 저울질하며 양다리를 걸치려는 비겁함에서 빨리 깨어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과 사역을 빙자하여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표적을 쫓는 불의와 불법의 삶을 빨리 멈추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영과 진리의 예배인 증인을 삶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고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또 목교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들을 가로막는 이 세상의 질고를 잘 믿고 순종하면 해결해 주겠다는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표적을 쫓고 있는 우리들의 실체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임도 분명하게 알아
표적과 기사를 쫓는 예배인 율법에 따른 인위적인 착한 삶으로는 어쩌다 육신의 질고는 잠시 쉼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절대 선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생의 그 복은 절대로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며 착함을 추구하는 또 다른 표적인 법과 잣대를 만들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 또 다른 표적을 쫓는 삶이 됨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의 사역은 우리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참으로 의로운 것임을 알고 영과 진리의 예배인 증인의 삶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 표적인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인 외모로 판단하며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이성과 감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회개하고 복음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착한 행실을 비롯하여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그저 받아 감사하며 모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의 삶을 각자 인생의 때가 찰 때까지 기쁨으로 누리면 됨을 명심하여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우리들의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판단하여 스스로 선생이 되고 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또 무엇을 해야 한다고 나팔을 불고 꽹과리 소리를 울리며 미혹함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불의요 불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또 폄훼하는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스스로 멸망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을 미혹하여 중심을 잃게 하고 점점 혼미해 가게 하고 있음과 또 우리들이 아직도 이런 피조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런 세상의 중심을 잡겠다는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각자가 자신의 본질을 알고 스스로 먼저 중심을 잡는 것이 우선으로 이것이 바로 회개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와 우리 자신의 잔이 이미 넘치고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아직도 이 세상이 요구하는 자신의 욕망의 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며 기쁨을 쓰레기 통에 버리고 슬픔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려야 살길이 있지 자신의 생각과 아집에 빠져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바로 멸망이요 사망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자유는 이 세상의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으로도 절대로 손상할 수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것으로 우리가 다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함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불가능에 도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역을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임을 알고
천제 증인으로 이미 확정된 구원의 결과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믿고 누리며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지 그 때를 우리 스스로 확인하기 위하여 발악하는 것이나 또 믿지 못함을 믿는 척하기 위하여 벌거숭이 임금님 같은 모습으로 참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의 도전이며 하나님의 사역을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이 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도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담대하게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누리기보다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인 외모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넘어지면 승리의 기쁨 대신에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결국 실족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선생이 되면 화가 있다고 경고 하시며 오직 천국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은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이 남과 또 그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하고 찬란하여 그 영광으로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고 한 것처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나는 이미 그렇게 되었음은 믿음으로 바라보고
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재앙인 심판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리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오히려 은혜요 복임을 알아 두려워하기보다 감사하게 받아 누려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님의 도움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분명하게 알고 빨리 우리들은 힘과 능력으로 하겠다고 하는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믿음으로만 보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보다 우리 눈에 보이고 잡힐 것 같은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인 외모로 판단하려고 불가능에 도전하면 그것이 바로 도둑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 곧 선생이 되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듯이 우리의 죄악을 온전히 제거해 버린 후 아름다운 옷을 입힌 것처럼 구원을 완성해 주셨음을 확실하게 믿고 이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여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누리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들려주시는 말씀의 이유와 목적이 누구든지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최후 승리자가 되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보면 대단한 신앙의 선배들을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또 목교세들과 이 세상이 진리처럼 나팔을 불고 있는 거룩함과 착함을 비롯하여 교육, 환경, 성경공부, 기도, 섬김, 봉사, 나눔 등 결국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불가능의 외부조건인 이 세상의 삶에 도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최초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피조물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유혹이 우리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고 또한 한계이며 실체임을 보여 주시며
솔로몬의 그 깊은 탄식의 고백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성공은 신기루처럼 살아질 헛되고 헛된 것이며 또 잠깐의 성공이지 영원하고 온전한 승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사와 자칭 신앙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위하여 이러한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기복신앙으로 넘어지게 하거나 다시 율법(외모)에 도전하게 함으로 생명의 복음을 빙자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끝임 없이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는 또 하나의 이유와 목적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나와 우리들이 원하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복임을 말하고 있으며
또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선함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려고 해도 그 중심까지 즉 절대로 완벽하고 온전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피조물의 또한 실체요 한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패역하고 답이 없는 우리 피조물의 실체와 한계를 보여 주시고 이것으로 아무 변명을 할 수 없게 한 후 심판으로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암처럼 웅크리고 있다 결국 멸망으로 이끌어 갈 달콤하게 포장된 유혹과 출구가 없는 미로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직접 우리 인생의 길이 되어 주신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질 헛된 이 세상의 것에 감사의 초점을 맞추어 황당하게도 그것을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이 세상을 미혹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며 안타깝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런 목사와 자칭 지도자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복의 실체를 깊이 묵상하여 분별하고 또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또 날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 항상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꼭 명심 할 것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에 따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의 잔은 이미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보고 확실한 증거를 삼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천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족함을 모르고 항상 목마름과 갈증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답이 없는 이 세상의 것으로 답을 찾아 위로를 받으며 증거를 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피조물의 본질과 목적을 놓치고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또 자신들의 기득권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상대방을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자신과 이 세상을 미혹하며 그것을 찾아 광야인 이 세상으로 달려가면 그 끝은 항상 멸망으로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흠 없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에 스스로 온전히 순종한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 것은 우리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불가능의 도전임과 또 잠깐의 성공이 영원한 승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임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우리 피조물의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보다 이세상을 좀더 좋은 조건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여 달콤할 것 같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이 불가능하고 패역한 도전을 계속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폄훼할 뿐 아니라
일시적인 성공을 온전하고 완전한 승리처럼 복이라고 본질을 왜곡하여 미혹하며 이 세상에서 참 빛을 찾아 방황하는 이에게 맞춤형 빛과 소금이 되는 증인이 되기보다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또 다른 빛과 소금인 선생이 되기 위한 욕망과 유혹인 외모로 끝없이 서로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에 서려고 발악을 하고 있지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윗과 솔로몬이나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의 길도 우리 피조물 스스로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구원을 이루게 하는 온전한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접근하여 그 속에 사랑 즉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결국 살리는 젖으로 삶아 죽이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우상으로 하나님을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이 되어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사랑이시고 공의로 우시며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조물로서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인 구약인 율법을 우리들을 대신하여 온전하게 완성하신 새로운 언약인 복음을 회개하고 믿어 영원 불변의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 피조물의 목적이요 사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미혹하며 율법과 교회와 목사와 복이란 이름으로 천국의 배설물을 붙잡고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결국 자신의 자랑인 무례함을 신앙 간증이란 이름으로 자화자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분별하고
또 반대로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경우 스스로 죄인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벙어리 냉가슴을 태우듯이 전전긍긍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했음에도 불하고 아직도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궤를 보관하는 하나님의 전을 만들기 위하여 발악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배와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분별하지 아니하든지 결국 구약과 신약을 혼합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의로워져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전지전능하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알아 온전하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인 당신을 우리 인생의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주신 복음은 결국 구약은 우리 피조물로서 그림이 떡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의 역사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도구로 주신 부부나 혈연이나 재물이나 건강 등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착각하여 실패한 것임을 고백하고 도구를 도구로 인정하는 회개로 도구가 아닌 진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복음 즉 오직 예수로 구원을 받아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라는 것으로
이를 확인해 주기 위하여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온 혈연이나 족보를 비롯하여 도구의 중요성이 살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도구를 다 버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하나님의 뜻인 복을 평가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을 두고 천국의 배설물이 하나님의 뜻인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인 복이 아닌 배설물을 갈망하는 헛된 삶에 도전하게 된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분별하라고 주신 이성과 서로 사랑하려고 주신 감성의 조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의롭고 순결하고 착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 되신 후 그것을 믿음과 은혜로 받아 누리면 그것을 우리의 의와 순결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고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온 땅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죽여 그저 온 땅에 사랑의 시체들로 인하여 악취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만 진동을 하고 있으며
정말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죄의 권세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어 최후 승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지침서인 요한 계시록의 말씀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금기하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할 뿐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통과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주셨지만 이제는 이미 빈 껍질이 되어버린 제사(형식적인 예배), 성전(교회), 제사장(목사), 십일조, 율법(착하고, 구별된 순결한 삶), 가정을 비롯하여 이 세상이 요구하는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매달리는 고난을 요구하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역을 폄하하는 것으로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절대로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 말세의 기간을 견디어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를 극복하는 비밀이 바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천국과 이 세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리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예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또 다른 나 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종말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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