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주지 못함에 서러워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는 그 자리

패스라 2010. 3. 20. 10:06

오늘 묵상하는 사무엘상2035-42절 말씀 중에서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감사하며 이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단한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느낌인 살아있는 감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온전한 글이나 말이나 그림이나 그 어떤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이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된 문자 그 자체가 본질이요 진짜처럼 믿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본질과 핵심을 놓치고 있음을 알 때

 

솔로몬의 지혜로 만든 그 모든 부귀와 영화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한 송이 들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할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악령이 사울에게서 떠난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다윗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 그렇게 되었다던지 하나님께서 표현된 문자처럼 성령과 악령을 가지고 피조물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와 우리의 하나님으로 폄훼하는 심각한 불의와 불법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보여지는 문자는 대역한 피조물인 저자의 표현방법이고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 보여지고 느껴진 것일 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표현된 것처럼 성령과 악령을 가지고 장난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때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로서 포도나무에 떨어지면 그것이 악령에 속한 것처럼 사망으로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면 살아있는 것이 된다는 것으로

 

다윗의 수금 소리에 감동된 사울의 이성과 감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모습이 될 때 다윗의 수금 연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 다윗이나 다윗의 수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 지금의 교회나 목사처럼 표적인 외모를 쫓아 악취를 풍기며 헛소리를 하게 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등장하는 골리앗은 이 세상처럼 너무나 대단하고 완벽하게 보여 우리들이 이 세상의 위세에 눌려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소년의 작은 돌맹이 하나에 무너질 헛된 것일 뿐 아니라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윗이 사울에게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근거로 말한 핵심의 실체는 사자나 곰도 그 수염을 잡고 쳐죽인 것처럼 자신의 힘과 용기임에도 불구하고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하는 것과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최고의 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무기를 외면한 것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익숙하지 못하여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무기로 나가기 위함일 뿐 아니라 그간 사용한 자신의 힘과 용기와 무기를 신뢰하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는 말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멋있고 아름답게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것을 비롯하여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도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고 하는 것도 요나단의 서로 사랑의 도전으로 보아야지 요나단을 다윗의 성공을 위한 도구를 보면 안될 뿐 아니라

 

사랑하라고 하면서 우리 곁을 떠나간 김수환추기경이 말하는 사랑과 무소유를 부르짖다 떠나간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이 세상의 시각으로는 멋있지만 예수님께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는 온전한 방법도 그 사랑도 아니고 또 불법이 말하는 온전한 방법도 무상과 무아의 경지도 아닐 뿐 아니라

 

신앙에서 말하는 무소유 정신이란 소유하는 것을 피하여 소유하지 아니하려고 발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른 무소유의 정신이고 삶임을 알아야 소유에 대란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신경전과 거래를 통하여200명의 목숨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등 누구보다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한 기지를 잘 발휘하는 것을 지혜롭게 행한다고 성경 기자가 평가하는 그 다윗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하는 사울의 모습이 처음도 아님에도 정면으로 당당하게 대면하기보다 육신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하는 것이나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려고 달려 갔지만 사무엘의 위세를 넘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병자나 이상한 무당처럼 사무엘 앞에서 옷을 벗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워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속담 거리가 되었음에도

 

정면으로 대면하기보다 다시 요나단에게로 도망하여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고 하면서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불안해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윗에게

 

요나단이 외모로 판단하여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고 또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고 하나님을 빙자하며 다윗을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였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사랑이란 이름의 젖으로 삶아 죽여 다시 도망자로 만들며

 

이를 대단한 사랑이나 의리처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며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주지 못함에 서러워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는 그 자리에

 

만약 자신을 팔아 죽음으로 이끌어 갈 제자 갸롯 유다를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시며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며 증인의 삶을 사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율법은 그 자체로는 온전하여 우리들이 스스로 온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문제는 사울뿐만 아니라 다윗이나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어떤 대단한 피조물도 율법으로 절대로 온전해 질 수 없는 스스로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음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우리들이 율법으로 온전 하려고 하는 불가능의 도전인 번제(섬김,봉사,나눔, ..)를 비롯하여 그 어떤 제사(주일성수 등..)보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삶인

 

즉 하나님의 뜻인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사명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대단한 일을 하거나 아름답고 멋진 교회를 짓거나 대단한 부흥을 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범 종교인이 되거나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만한 대단한 선생이나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대단한 일을 하거나 아름답고 멋진 교회를 짓거나 대단한 부흥을 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범 종교인이 되거나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만한 대단한 선생이나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은 점치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되어 결국 스스로 실족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는 곧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인 외모로 판단하여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여 도구로 사용하면 결국 구원의 본질을 놓치고 그저 이 세상의 성공이 본질처럼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바로 자신이 실족하여 멸망의 늪으로 빠지는 것이 된다는 아주 두려운 경고의 음성임을 명심하여 

 

지금까지 우리들이 온전하고 완전한 지혜인 여호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각자 필요한 부분만 보는 지식인 나의 하나님을 지혜처럼 온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과 잠에서 깨어나 지식은 전체 즉 본질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기에 보는 각도에 따라 각자의 답은 있지만 그것은 그저 각자의 답일 뿐이고 참이고 본질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고 또 우리 피조물은 오직 믿음으로만 참인 본질을 보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피조물의 한계이고 실체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로 먼저 이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회개 없이 지식이고 표적인 외모로 판단하여 인생의 답을 찾으려고 구약인 율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교와 철학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다 결국 신은 죽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는 등 꽹과리 소리와 헛소리로 이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대단한 피조물이라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과 또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직접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온전하고 완벽한 유일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신 것을 알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소유한 후 

 

오늘 보여주시는 그림처럼 피조물로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행위로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그저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증인의 삶을 각자 인생을 때가 찰 때까지 신나게 누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참 목적이고 사명이다.

 

때문에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에 따른 우리들의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판단하여 스스로 선생이 되고 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또 무엇을 해야 한다고 나팔을 불고 꽹과리 소리를 울리며 미혹함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불의와 불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또 폄훼하는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스스로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이고

 

또 이런 피조물의 목적의 본질과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부족한 지식으로 이 세상의 중심을 잡겠다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오히려 이 세상으로 하여금 중심을 잃고 점점 혼미함의 깊은 수령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아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는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와 우리의 새로운 피조물은 이미 그 잔이 넘치고 있음에도 이를 모르고 아직도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욕망의 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괴로워하며 기쁨을 쓰레기 통에 버리고 슬픔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를 날마다 묵상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자유는 이 세상의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으로도 절대로 손상할 수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것임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어설픈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함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나

 

천제 증인으로 이미 확정된 구원의 결과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믿고 누리며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기보다 그 때를 우리 스스로 확인하기 위하여 발악하는 것이나 또 믿지 못함을 믿는 척 하기 위하여 표적인 외모를 쫓아 벌거숭이 임금님 같은 모습으로 참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도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이 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도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담대하게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누리기보다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확인 하려는 유혹에 넘어지면 승리의 기쁨 대신에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결국 실족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선생이 되면 화가 있다고 경고 하시며 오직 천국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 말씀을 깊이 명심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은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이 남과 또 그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하고 찬란하여 그 영광으로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고 한 것처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나는 이미 그렇게 되었음은 믿음으로 바라보고

 

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재앙인 심판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리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오히려 은혜요 복임을 알아 두려워하기보다 감사하게 받아 누려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님의 도움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분명하게 알고 빨리 우리들은 힘과 능력으로 하겠다고 하는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하고 믿게하기 위하여 주신 이성과 감성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우리 눈에 보이고 잡힐 것 같지만 살아질 신기루 같은 헛된 이 세상을 알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도둑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 곧 선생이 되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듯이 우리의 죄악을 온전히 제거해 버린 후 아름다운 옷을 입힌 것처럼 구원을 완성해 주셨음을 확실하게 믿고 이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여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누리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들려주시는 말씀의 이유와 목적이 누구든지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최후 승리자가 되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보면 대단한 신앙의 선배들을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또 목교세들과 이 세상이 진리처럼 나팔을 불고 있는 거룩함과 착함을 비롯하여 교육, 환경, 성경공부, 기도, 섬김, 봉사, 나눔 등 결국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불가능의 외부조건인 이 세상의 삶에 도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최초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피조물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유혹이 우리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고 또한 한계이며 실체임을 보여 주시며

 

솔로몬의 그 깊은 탄식의 고백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성공은 신기루처럼 살아질 헛되고 헛된 것이며 또 잠깐의 성공이지 영원하고 온전한 승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사와 자칭 신앙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위하여 이러한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기복신앙으로 넘어지게 하거나 다시 율법에 도전하게 함으로 생명의 복음을 빙자하여 죽음으로 이끄는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끝임 없이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는 또 하나의 이유와 목적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나와 우리들이 원하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복임을 말하고 있으며

 

또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선함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려고 해도 그 중심까지 즉 절대로 완벽하고 온전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피조물의 또한 실체요 한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패역하고 답이 없는 우리 피조물의 실체와 한계를 보여 주시고 이것으로 아무 변명을 할 수 없게 한 후 심판으로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암처럼 웅크리고 있다 결국 멸망으로 이끌어 갈 달콤하게 포장된 유혹과 출구가 없는 미로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직접 우리 인생의 길이 되어 주신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질 헛된 이 세상의 것에 감사의 초점을 맞추어 황당하게도 그것을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이 세상을 미혹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며 안타깝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런 목사와 자칭 지도자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복의 실체를 깊이 묵상하여 분별하고 또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또 날마다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항상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꼭 명심 할 것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에 따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의 잔은 이미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보고 확실한 증거를 삼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천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족함을 모르고 항상 목마름과 갈증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답이 없는 이 세상의 것으로 답을 찾아 위로를 받으며 증거를 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피조물의 본질과 목적을 놓치고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또 자신들의 기득권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상대방을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자신과 이 세상을 미혹하며 그것을 찾아 광야인 이 세상으로 달려가면 그 끝은 항상 멸망으로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흠 없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에 스스로 온전히 순종한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한 것은 우리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불가능의 도전임과 또 잠깐의 성공이 영원한 승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임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우리 피조물의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보다 이세상을 좀더 좋은 조건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여 달콤할 것 같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이 불가능하고 패역한 도전을 계속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폄훼할 뿐 아니라

 

일시적인 성공을 온전하고 완전한 승리처럼 복이라고 본질을 왜곡하여 미혹하며 이 세상에서 참 빛을 찾아 방황하는 이에게 맞춤형 빛과 소금이 되는 증인이 되기보다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또 다른 빛과 소금인 선생이 되기 위한 욕망과 유혹으로 끝없이 서로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에 서려고 발악을 하고 있지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윗과 솔로몬이나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의 길도 우리 피조물 스스로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구원을 이루게 하는 온전한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접근하여 그 속에 사랑 즉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결국 살리는 젖으로 삶아 죽이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우상으로 하나님을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이 되어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사랑이시고 공의로 우시며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조물로서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인 구약인 율법을 우리들을 대신하여 온전하게 완성하신 새로운 언약인 복음을 회개하고 믿어 영원 불변의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믿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미혹하며 율법과 교회와 목사와 복이란 이름으로 천국의 배설물을 붙잡고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결국 자신의 자랑인 무례함을 신앙 간증이란 이름으로 자화자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분별하고

 

또 반대로 이 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경우 스스로 죄인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벙어리 냉가슴을 태우듯이 전전긍긍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했음에도 불하고 아직도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궤를 보관하는 하나님의 전을 만들기 위하여 발악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배와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분별하지 아니하든지 결국 구약과 신약을 혼합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의로워져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전지전능하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알아 온전하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인 당신을 우리 인생의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주신 복음은 결국 구약은 우리 피조물로서 그림이 떡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의 역사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도구로 주신 부부나 혈연이나 재물이나 건강 등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착각하여 실패한 것임을 고백하고 도구를 도구로 인정하는 회개로 도구가 아닌 진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복음 즉 오직 예수로 구원을 받아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라는 것으로

 

이를 확인해 주기 위하여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온 혈연이나 족보를 비롯하여 도구의 중요성이 살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도구를 다 버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세상의 이성과 감성인 외모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뜻인 복을 평가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을 두고 천국의 배설물을 하나님의 뜻인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인 복이 아닌 배설물을 갈망하는 헛된 삶에 도전하게 된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분별하라고 주신 이성과 서로 사랑하려고 주신 감성의 조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의롭고 순결하고 착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 되신 후 그것을 믿음과 은혜로 받아 누리면 그것을 우리의 의와 순결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고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온 땅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죽여 그저 온 땅에 사랑의 시체들로 인하여 악취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만 진동을 하고 있으며 

 

정말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죄의 권세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어 최후 승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지침서인 요한 계시록의 말씀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금기하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할 뿐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통과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주셨지만 이제는 이미 빈 껍질이 되어버린 제사(형식적인 예배), 성전(교회), 제사장(목사), 십일조, 율법(착하고, 구별된 순결한 삶), 가정을 비롯하여 이 세상이 요구하는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매달리는 고난을 요구하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역을 폄하하는 것으로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절대로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 말세의 기간을 견디어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를 극복하는 비밀이 바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천국과 이 세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리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예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또 다른 나 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종말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