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패스라 2011. 2. 21. 08:33

오늘 묵상하는 요나41~11절 말씀 중에서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감사하며 이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 지는데

 

그것은 이미 묵상한 것처럼 요나는 스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기에 자신의 방법인 외모에 따라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하여 가로막는 모든 시험을 스스로 감수하려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는 대단히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바로 가룟 유다의 모습일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을 위하여 각자의 생각인 외모에 따라 교회를 짓고 섬김과 나눔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천국의 본질을 미혹하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면서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착각에 빠져 있는 목교세들의 모습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가 우리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요나가 우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아무리 외모를 따라 경외하고 순종하려고 해도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임을 바로 알 때

 

복음서의 묵상을 통하여 사복음서의 조화와 진짜 감동 그리고 복음사역의 실체와 본질에 대하여 확인한 것처럼 구약의 방법인 죄 사함의 회개와 율법의 지킴과 순종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불가능하여 외모가 아닌 믿음으로 온전한 경외와 순종을 이루므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음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항복한 후 어쩔 수 없이 사흘 동안 걸어야 되는 큰 성읍을 삼 개월도 아니고 삼십 일도 아니고 삼 일도 아닌 단 하루 동안 재앙을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대충 건성으로 그리고 모양만 취하고 빨리 달려 지나가며 재앙을 선포하여 니느웨 사람들이 이를 알아듣지 못하던지 아니면 건성으로 듣고 경고를 무시함으로 결국 재앙을 피하지 못하길 바라는 요나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심하리만큼 철저한 회개가 일어나 재앙을 피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목교세들의 말처럼 요나의 항복을 회개로 미화하여 강조한 요나의 역할이나 그 역할을 빙자하여 전도나 선교를 강요 당하고 있는 우리의 역할도 아니고 또 쇼처럼 너무 철저한 회개를 한 니느웨 사람들의 외모도 아닌

 

그런 어설픈 재앙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너무 철저한 회개를 일어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보여주는 그림을 이 세상의 잣대인 외모로 보고 판단하여 확대 포장 해석함으로 오히려 헛다리를 집고 있는 피조물의 한계를 보여주신 후 

 

오늘은 자신의 마음에 매우 들지 않았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도망가기보다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 자신의 불만을 하나님께 그대로 표시하고 하나님의 답을 듣고 판단하기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에 앉아 잠시 관망하며 기다리는 요나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은

 

기록된 말씀처럼 니느웨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룻밤에 말라 버리는 박넝쿨과 니느웨에 모든 것과의 차이처럼 피조물과 하나님의 판단기준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인 것을 알 때

 

요나가 외모로 판단한 자신의 정의와 용기와 믿음으로 인하여 그 바다와 그 배를 힘들게 한 것처럼 크리스천의 정의와 용기와 믿음으로 이 세상을 미혹하여 힘들게 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고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방황하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인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여지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영접하므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받은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아직 미완이라고 목교세들이 미혹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또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완성된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그리고 믿음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돌이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제는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음에도 지금도 이런 가짜 복음이 예수의 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이므로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에 자긍심을 가지고 믿음의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과 감사를 하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말했단 말인가?

 

때문에 이런 미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성령님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죄와 의와 심판으로 아는데 사용해야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능력 등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여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을 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은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기적과 이적을 위하여 사용하면 이 세상의 착한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초능력의 선생과 심판 자로 군림하며 순종을 강요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함으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여 변질 왜곡된 교회의 모습 일뿐이다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복음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나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시는 교회인 천제증인으로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교회란 틀로 포장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된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를 비롯하여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하여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착함을 비롯하여
 
부부나 혈육의 관계나 제도가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또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멈추어야 한다
.
 
뿐만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은 외모인 그런 세상적인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요 예배와 기도와 찬송이며 율법의 완성으로 이미 의인으로 확증된 것이기에 지금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여 그것을 누리는 천국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외모로 판단하여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시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인 증인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도 역시 오직 예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즉 심판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