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고 기록이었으며
신약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이론은 가능하지만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인정한 후 이를 위하여 각자의 잔에 차 있는 율법이나 구습이나 자아인 도덕천을 완전히 비우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피조물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여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목적이요 사명이며 복중에 복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로 보면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만 바라보며 실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시며 가라고 할 때 그냥 믿고 갔으면 될 것을 복음에 대한 무지로 착각하여 감히 하나님의 짐을 대신 지겠다고 외모에 따른 판단으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세운 후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며 도덕천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도덕천의 법과 교회를 만들어
사람과 교회당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이제는 장로와 안수집사에 이어 목사, 강도사, 전도사, 서리집사, 권사, 권찰, 사무장, 사찰집사 등의 여러 직분으로 구분한 것을 외모로 보면 참으로 온전하고 합당한 방법 같지만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썩은 악취로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바울처럼 선생이 되어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항상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가 평탄케 하였으며 또 불과 구름으로 밤낮을 보호하며 인도하였음을 직접 보고 누렸으니 이제는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모세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또 자신의 자랑을 위하여 외모로 판단함으로 불안하여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고 하는 도덕천의 판단에 따른 달콤하고 명분 있는 주장에 넘어 져 오히려 좋게 여기므로 정탐을 보내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세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당황한 그들이 돌이켜 싸우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싸우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방조하여 패하였을 뿐 아니라 그 불순종의 결과로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그들과 또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의 목교세들까지 외모인 이 세상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보기보다 도덕천만 보고 결국 이 세상을 잘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미혹함으로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 신기루 같은 자신과 자신의 자랑을 위하여 사랑이 없는 도덕천의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며 오히려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때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다 이루어진 것과 또 징계 받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부족함이 없었던 기적은 모세가 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한 길로 잘 걸어온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바울처럼 모세가 보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한 이스라엘을 향한 부모와 선생의 심정으로 불안하고 안타까워 끝까지 가슴에 품고 염려하는 이
오병이어를 비롯한 수많은 기적들처럼 징계기간인 사십 년 동안 전혀 부족함이 없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과 불의와 불법의 역사요 증표이며
바울처럼 증인이 아닌 부모나 선생의 심정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도덕천에 따른 자신의 자랑을 위한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자랑이요 공적처럼 아주 자랑스럽게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을 통과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합격 통지서도 아니고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고 하는 요한 계시록의 말씀처럼
극복하지 못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도덕천으로 무장하여 다시 도전하여 극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빨리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세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도 믿지 못하면서 피조물인 자신을 믿으라고 아모리 왕 시혼에게 억지를 부리며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내가 당신의 나라를 통과해야겠으니 용납하고 물과 양식을 우리들이 사 먹도록 해주면 그냥 조용히 지나가겠다고 하면서
역사에 기록된 일본 놈 같은 억지 주장과 명분으로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결과를 두고 신앙간증을 하듯이 자신의 실적을 자랑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미혹할 뿐 아니라
절대 정당하거나 공평하지 않음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로 판단하여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 뜻으로 미혹하여 주장하는 것은 온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도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확인한 것처럼 회개하지 않는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을 탄식하게 하는 짓이며
그런 불가능의 도전으로 인하여 오히려 피조물 스스로 고통의 시간만 연장한 것으로 결국 도덕천과 여호와 하나님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역사요 증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 했으면 전혀 불필요한 바산 왕 옥과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뜻과 명령으로 미혹하여 정당화하며 자랑처럼 성읍과 유아를 포함한 사람은 진멸시키고 가축과 물건은 소유로 삼은 것을 자랑처럼 말하는 것이나
또 하나님께 충성스런 종이요 대단히 훌륭한 지도자 모습으로 후계자 여호수아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아주 꼼꼼하고 자상하게 빈틈없이 인수 인계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참 잘나갈 때인 민수기 20/12절에서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행한 모세 자신의 불신과 불의와 불법으로 실격 받을 때는 자신의 의에 빠져 가볍게 여기며 넘겨놓고
바울이 잠시 맛본 천국에 빠져 오히려 악을 발한 것처럼 요단 강을 앞에 두고 눈으로 잠시 바라 본 그곳이 너무 좋은 신천임을 알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복음의 무지에 따른 착각으로 한평생 불가능에 도전한 자신의 과실을 오히려 공적과 자랑으로 착각하여 이를 등에 업고 하나님께 매달렸기에 당연히 실족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은 그들 때문이란 착각으로 결국 자신의 과실과 실족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말들로 미혹하고 있지만
가나안은 그렇게 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악을 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강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이는 결국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무지로 자신처럼 이스라엘을 수령으로 이끄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도덕천의 하나님으로 미혹하면서 자신의 불만과 불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보다 우리들의 모습들처럼 주변에서 찾아 너희들 때문이란 변명과 핑계로 인하여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는 말씀의 본질이 회개임을 깨닫지 못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도덕천으로 미혹하여 폄하할 뿐 아니라
기복신앙으로 회유 협박하면서 결국 모세 스스로 도덕천의 잣대로 인도한 불가능의 도전인 환난 속에서 돌이켜 회개함이 바로 끝날 임에도 외모의 종말을 빙자하여 자신의 불신과 불의와 불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할 뿐 아니라
때를 될 때까지 기다리며 그래도 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인도하심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함으로 깨달아 회개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모세 자신이 말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킴으로 복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라고 하면서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기 위하여 외모인 도덕천의 잣대로 보면 참으로 멋있는 제도인 도피성을 비롯하여 자신이 실패한 삶의 원인을 바로 복음에 무지한 자신의 무지임을 깨닫지 못하고
오늘도 계속하여 실패의 원인을 주변으로 돌리며 자신을 진리로 착각한 신앙간증을 통하여 다시 십계명 도전하라는 불가능의 도전을 선포하는 악을 행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인 감동을 묵시로 받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여지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영접하므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받은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아직 미완이라고 목교세들이 미혹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또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완성된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그리고 믿음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돌이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제는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음에도 지금도 이런 가짜 복음이 예수의 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이므로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에 자긍심을 가지고 믿음의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과 감사를 하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말임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이런 미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성령님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죄와 의와 심판으로 아는데 사용해야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능력 등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여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을 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은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기적과 이적을 위하여 사용하면 이 세상의 착한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초능력의 선생과 심판 자로 군림하며 순종을 강요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함으로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여 변질 왜곡된 교회의 모습 일뿐이다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복음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나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시는 교회인 천제증인으로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교회란 틀로 포장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된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를 비롯하여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하여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착함을 비롯하여
부부나 혈육의 관계나 제도가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또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멈추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은 외모인 그런 세상적인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천국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요 예배와 기도와 찬송이며 율법의 완성으로 이미 의인으로 확증된 것이기에 지금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여 그것을 누리는 천국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외모로 판단하여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시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인 증인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도 역시 오직 예수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즉 심판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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