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패스라 2011. 5. 5. 08:43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묵상하는 누가복음240~52절 말씀 중에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알고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인 행복을 누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고 기록이었으며

 

신약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이론은 가능하지만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인정한 후 이를 위하여 각자의 잔에 차 있는 율법이나 구습이나 자아인 도덕천을 완전히 비우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피조물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인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회개하고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완성하여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목적이요 사명이며 복중에 복인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모로 보면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나 도덕천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가르치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실족하고 있는 그림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를 도덕천인 외모로 보면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등 하나님과 이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지도자의 모본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당신을 믿고 따르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고 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상충되므로 이를 분별하기 위하여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들이 기도할 때 예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 품고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며 열거하는 제목들을 위하여 말만하지 결코 목숨을 걸기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나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시민단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국민의 뜻이라고 발악하여 나팔을 불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로 전체 국민의 뜻이 아님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그 자신들부터 먼저 알고 있을 것처럼

 

우리 민족의 아픔인 통일만 하더라도 방법 시기 등 모든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 다양하여 절대로 하나의 뜻으로 도출할 수 없기에 국민 투표가 나온 것이고 그 결과를 인정하기로 약속한 것이지 결코 그것이 모든 국민 개인의 뜻이 실제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지금 우리 주변에 종교와 이세상의 지도자들이 도덕천에 따라 모두가 흠모할 고넬료 같은 가정을 꿈꾸고 있지만 그런 가정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망측한 사건들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고넬로는 온 집안을 도덕천이란 이름의 젖으로 삶아 죽이는 불의와 불법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정의와 공평과 공의를 충족하는 삶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바울도 복음에 대한 무지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복음인 예수 즉 천국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복음이 아닌 도덕천에 따라 적용함으로 스스로 사도가 되고 부모가 되어 믿음이 대물림 되가나 자신의 안수가 하나님의 은사를 되살리게 하는 것처럼 미혹하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오는 고난에 대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나 이를 현실적으로 극복할 능력과 사랑과 절제가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기에 이제는 어떠한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할 성령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숙한 여인이란 오직 남편과 자식과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과 사랑이기에 당연하게 자식들이 감사하고 남편의 칭찬할 뿐 아니라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값이 진주보다 더하기에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묵상한 것처럼 그렇게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손의 열매가 그의 남편이나 자식이나 가정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돌아가간다고 하셨음에도

 

그 하신 말씀에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도덕천을 따르는 것이 동일한 것으로 본질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별하여 분명히 인식할 때

 

도덕천에 따른 곱고 아름다운 모습인 현숙한 여인은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는 거울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있지만 실제 자신은 구원에서 실족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미움을 받지만 실제 자신은 구원을 받아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하며

 

또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자식이 있는 동기보다 오히려 남편에게 더 사랑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며 누리기보다 외모에 따른 자신만의 만족을 위하여 제사장으로부터 술 취한 여자로 오해를 받을 만큼 발악을 하다가 결국 아들을 얻게 되자

 

스스로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또 당사자인 사무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실인으로 보내야 하지만 안타까움에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인 매년제와 원제를 드리러 가는 것도 외면한 체 아이와 함께 있어보지만 젖을 떼자 할 수 없이 보내면서

 

실상은 자신의 위하여 발악을 해 놓고 아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처럼 또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아들을 허락했으니 나도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멋있는 명분을 세우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하여 북치고 장구치고 하지만

 

언제 하나님께서 나실인을 요구했으며, 또 하나님이 아닌 한나 자신의 외모에 따른 만족을 위하여 도구로 사용된 사무엘은 무엇이며, 한나의 그런 주관적인 선택은 사무엘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며, 외모로는 여호와께 경배를 하고 있지만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과연 합한 경배가 될 수 있으며, 한나 또한 어린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고 온전한 경배를 드리며 평안을 누리며 살수 있을지를 묵상해보면 답이 나올 뿐 아니라  

 

오늘도 보여주시는 예수와 그의 부모와의 일상의 한 면도 도덕천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한 점이 많은데 그것은 첫째, 부모가 어떻게 타지에서 유월절을 보내고 돌아가며 아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하루 길을 갈 수 있으며

 

둘째, 아이를 찾으며 급히 돌아간 급한 마음에도 어떻게 사흘이 지난 후에 만난 아이를 급히 반기기보다 선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관망하며 누릴 수 있으며

 

셋째, 돌발 행동에 대한 부모의 질책에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바른 행동이며

 

넷째, 이를 두고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며 또 함께 집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들었다고 할 뿐 아니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참으로 황당한 말을 할뿐 아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도덕천를 만족시키려고 발악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는 불의와 불법이 됨을 분명히 알 때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께는 더욱 사랑스러워가시지만 사람에는 이상하게 보여 미움을 받으나 어쩌지 못하는 것은 결국 율법인 도덕천은 본질이 아닐 뿐 아니라 신기루로 불가능의 도전임을 증거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뜻은 천지창조 때부터 초지일관 피조물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빨리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회개를 하고 인자로 오신 예수를 통하여 보여준 복음인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아 누리므로 증인이 되라는 것이기에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고넬료와 바울과 현숙한 여인과 한나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실상과 실족한 모습을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오직 본질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은혜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복인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은혜로 받아 확증된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이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때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빨리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 손가락이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음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한 것으로

 

지금의 제도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난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등을 비롯하여

 

인자의 예수나 부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등과 여러 가지 제도를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 도덕천에 따른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으로 곧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것을 누리는 삶으로 증인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율법의 완성이고 또 그것들이 손가락이 되어 가르친 것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확정된 구원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히 깨달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의 목적이 도덕천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그 예수를 우리가 사랑하기(살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시는 평안이고, 구원받은 복을 누리는 행복임을 분명히 알아야

 

복음에 무지함으로 도덕천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주신 인자인 예수와 도덕천인 율법과 혈연과 제도와 문화와 역사 등을 한계를 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확인하고 누릴 때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깨달아 날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으로 확정된 구원을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