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창세기 48장8~22절 말씀 중에서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고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완성해 놓고 그 완성되어진 과정과 완성한 이유와 목적을 우리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함으로 듣고 깨달아 구원을 받아 그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미 지난 역사의 기록이고 오직 요한 계시록만이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계획처럼 본질을 미혹하여 천국을 소유할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참담한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본질인 복을 바로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 각자에게는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위한 실재 상황임을 바로 알 때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원죄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그 원죄를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나 기록이 아니라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 된 것은 구원은 죄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실체도 없이 그냥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으로
피조물 스스로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에덴 동산에 선악과 생명나무가 있듯이 스스로는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고
자유의지에 따라 회개를 한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여 착하고 의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도전을 멈추겠다는 회개이기에 율법인 도덕천이나 혈연을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저 구원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지 절대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알 때
신약은 피조물이 구약의 본질을 깨달아 회개를 하고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그것을 은혜로 소유하게 해 주겠다는 것으로 이를 복음이라 하고
이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구원이라 하며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면 그 구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바로 새로운 계약으로 이를 신약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신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임을 바로 알 때
마태복음11장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도 이를 두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조물이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신기루요 허상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 온전함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며 이를 위하여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구원과 천국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를 소망이라 하고
피조물이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아직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 땅에서는 믿음으로 밖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 사실을 증거할 수 밖에 없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인 새로운 약속에 따라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인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답인 믿음만으로 절대 부족하고 현실적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 받아야 가능한 사역임을 절대 부인 할 수 없기에
자신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해야 할 사명인 구원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명령하고 또 강조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경이나 이 세상을 위한 도덕천의 외모가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미혹되어 실족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피조물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자유의지로 회개를 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아 누리라는 것임을 분명히 알 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에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용할 뿐 아니라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가인과 아벨(셋),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열한지파와 유다 지파,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열한제자와 가룟 유다처럼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의 잣대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딤후3장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분명하게 말해놓고 다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을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미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과 아직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도덕천에 따라 판단함으로 착각하여 제사나 예배나 기도를 비롯하여 착하고 의로운 자신의 행위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미혹하고 참인 것처럼 강요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구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등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복음의 예수는 각자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길로 우리들이 길로 인식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길처럼 고정되어 죽어있는 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다닐 수 있는 살아있는 길로 외모로 보면 길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들의 도덕이나 이성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다 길이 되지만 그 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할 때 만 누릴 수 있는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너와 나의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를 옮기지 않는 것이기에 부모나 선생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하여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결국 함께 실족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을 때
예수님의 경고처럼 선생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 뿐 아니라 그의 온전하고 완벽한 천국의 삶 같은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너무나 멋진 삶임을 감사하며 신나게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여주신 창세기 말씀의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던 원죄 논리는 도덕천인 외모에 따른 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한 것으로 너무나 심각하고 잘못된 것임을 바로 알 때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 지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피조물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은 사망은 바울을 비롯한 목교세들이 말하는 그 원죄를 비롯하여 죄의 결과가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당연히 죽는 것이기에 오히려 선악과를 먹으므로 인하여 영생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악과는 허락하시고 생명나무 실과는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피조물의 한계로 먹으면 오히려 죽기 때문으로 구원이란 바로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것이지만 피조물의 한계로 그것을 절대로 스스로 먹을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은 것처럼 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복음으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의 참 복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회개 하기보다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하여 자녀를 낳기 시작했다는 것과 이 세상의 문명을 발달시키고 그것이 복처럼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한 복의 제목들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도전인 불의와 불법임을 바로 알 때
외모로 보이는 성경 기록이 스스로 모순 속에 빠져 있음이 오히려 당연할 뿐 아니라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선과 악을 가로수로 사용하여 고정된 죽은 길을 만들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지만
야보고서 1장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에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복의 본질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에 피조물의 착하고 선한 도덕적인 어떠한 행위도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인정하는 회개를 한 후 예수를 영접할 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아브람 자체가 복이나 복의 근원이 절대 아닐 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비도덕적이고 야비한 아브람과 그 자녀들을 보고 각자 스스로 판단하여 복과 저주를 선택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함에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된 이 세상의 것을 복으로 착각하여 갈망하기에 복인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우리들이 복의 근원으로 착각하고 있는 아브람과 그 자녀들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따른 회개의 모형으로 보여주신 우리가 탕자로 알고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책망을 받아야 하는 그런 모습으로
아브람에게 허락한다는 복의 제목들을 비롯하여 결혼이나 자녀는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에 뜻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불의와 불법이 되며
셋이 아들을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천으로 말하고 있는 나의 하나님인 이 세상의 유혹이고 우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렇게 성공했다는 요셉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에 의하여 개명을 할 뿐 아니라 우상의 제사장 딸과 결혼하여 므낫세/위로와 에브라임/성공으로 부르는 것이나
하나님의 시험이란 가뭄과 기근에 야곱이 살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을 붙잡는 것이나, 막내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한 일반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나. 요셉이 총리로서 직접 백성들에게 곡물을 판다는 것이나, 형들을 알아보고 모른체할 뿐 아니라 정탐꾼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주장이나 또 정탐꾼이 아니란 형들의 주장이나
실패자로 몰아가지만 오히려 용기 있는 르우벤의 모습이나 자신의 부족함이나 현재의 상황을 아들들에게 전가하는 비겁하고 야비한 야곱의 일그러진 자녀 사랑의 모습이나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 하는 것처럼 포장한 야곱이 하나님의 시험인 가문과 굶주림 앞에 자녀를 비난하며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말 것을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처음부터 현실을 인정하고 부질없는 고집과 아집으로 지체하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이나 다녀와 배고픔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나
요셉이 형들의 절을 받으며 자신을 밝히지 않으며 베냐민에게만 음식을 다섯배나 주는 것이나 베냐민을 불모로 잡기 위하여 스스로 점치는 술사임을 고백하는 것이나 비상한 방법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 온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를 굴복시키는 방법이나
야곱이 스스로 기근에 굴복함으로 내려왔음에도 유다를 억지로 부각시키는 것이나 요셉의 속임수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미혹하는 것이나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계시처럼 모든 형제의 절을 받으며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처럼 말하는 대단한 요셉이 아브람의 대를 잇지 못하고 부끄러운 유다가 야곱 다음을 대를 이어가는 것이나
야곱과 그 가족들의 애굽 행이나 애굽에 정착하기 위하여 가족들이 작당할 뿐 아니라 스스로 애굽에 무해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야곱 자신의 인생여정을 비하함을 오히려 애굽 왕 바로 위에서 축복한 것처럼 미혹하는 것이나 용도 폐기해야 할 장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나
오늘 보여 주시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손자가 누구 인지도 모르는 혼미함 속에 도덕천이 여호와 사자에게 비는 복은 이 세상에 대한 야곱의 미련이고 희망사항으로
결국 창세기의 외모는 아브람 가문의 희망사항과 이 세상의 이치와 유익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명철하고 지혜로운 요셉을 하나님을 빙자하여 미혹하고 있는 것을 뿐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기에
그렇게 포장하여 미혹한 요셉이 한 일은 애굽의 번영과 바로 왕권 그리고 애굽 신의 제사장 입지를 더욱더 탄탄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요셉 자신의 부모 형제를 대대손손 430년의 노예생활로 이끌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세상은 스트브 잡스가 이 세상에 손안에 넣었다고 칭송하지만 좀 더 깊이 묵상해보면 컴퓨터나 스마트 폰의 노예로 만든 것이 되는 것처럼 복음에 무지한 아브람은 우리를 복의 노예로, 모세는 우리를 율법 즉 죄의 노예로, 바울은 우리를 복음의 노예로, 그리고 그들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과 그들의 이름을 빙자한 목교세들은 우리를 죄와 의와 심판과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신기루인 이 세상의 노예로 만들고 있음을 분명하게 분별할 때
성경과 이 세상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은 때를 잘 만나 잠시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구요 신기루이지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사명을 따라 승리한 삶의 증인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그렇게 불의와 위선으로 이어진 아브람 가문의 계보의 피가 우리의 구원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무의미 함을 알 수 있으며
그런 불의한 모습을 비롯하여 도덕천인 율법을 통하여 스스로는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음을 바로 깨달아 회개 하라는 것으로
결국 지금까지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복이란 것은 신기루 같은 이 세상을 위한 도구이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주시려고 한 복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달려가거나 또는 그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여 외면하며 혼자 달려가가나 결국은 둘 다 신기루 같은 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보들의 행진으로 그 마지막은 언제나 사망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은혜로 구원인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은혜로 받아 확증된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이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때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빨리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 손가락이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음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헛된 이 세상의 정의와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한 것으로
지금의 제도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난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등을 비롯하여
인자의 예수나 부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등과 여러 가지 제도를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 도덕천에 따른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으로 곧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것을 누리는 삶으로 증인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율법의 완성이고 또 그것들이 손가락이 되어 가르친 것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확정된 구원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히 깨달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의 목적이 도덕천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그 예수를 우리가 사랑하기(살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시는 평안이고, 구원받은 복을 누리는 행복임을 분명히 알아야
복음에 무지함으로 도덕천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주신 인자인 예수와 도덕천인 율법과 혈연과 제도와 문화와 역사 등을 한계를 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확인하고 누릴 때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깨달아 날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으로 확정된 구원을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거듭나는 살아있는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이미 지난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현재와 미래만 있음을 바로 알아야 과거에 메여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피었다 시들어버리는 꽃이 아니라 영생을 소유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살아있는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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