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마태복음12장1~8절 말씀 중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아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천국의 증인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역으로 피조물의 이해나 확인을 비롯하여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그 완성된 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하나님의 사역임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외모로 판단하여 감히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을 피조물의 이해 가능한 영역 안에 넣기 위하여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를 비롯하여 요한 복음서에는 언급도 되지 않은 예수의 족보를 억지로 만들고 성령잉태나 동정녀 등을 강조하며 잉태에 이어 출생까지 신비로 감싸 신화같이 포장한 1장과 2장은 복음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구약의 말씀을 빙자하고 각색하여 오히려 진짜처럼 기록한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배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됨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복음에 무지한 세례 요한도 자신의 분명한 사명이 복음을 위하여 예수께 세례를 주고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하여
복음의 본질과 전혀 다른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며 행하는 것은 스스로 복음의 증인이 되기보다 대단한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그것이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는 그림을 마가가 복음의 시작으로 선포함으로 반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그림이나 광야에서 시험 받는 그림을 외모로 판단하여 신비하게 기록된 것을 그대로 사실로 믿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찾기 위하여 구약의 말씀을 빙자하고 각색하여 사실처럼 멋있고 대단하게 표현하여 기록함으로 외모로 보면 정말 진짜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복음의 예수를 대단한 종교인으로 폄훼하는 것으로 결국 많은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일 뿐 복음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히려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됨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하여 보여주시는 그림을 보면 스스로 대단한 종교인이 된 요한이 정권과 맞서다 잡혀가고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복음을 선포하다 배척당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과 또 누가처럼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본질을 구약인 이사야 61/1~3의 말씀으로 빙자하고 각색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지금까지 참으로 믿고 달려온 결과
복음의 본질을 따라 자신의 구원을 위한 정직함과 솔직함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잔을 온전하게 채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인 행복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내면에는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임에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대단한 명분으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위하여 상대방의 잔을 채우는 것으로 자신의 잔을 채움으로 구원받아 행복을 누리려는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는 대단한 종교인이 됨으로
결국 신기루 같은 허상을 붙잡기 위하여 이를 따르는 많은 종교인을 양성해야 하는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도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미 완성된 재림이 다시 있을 것이란 복음의 무지에 미혹되어 지금까지 자유와 쉼이 없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각자 자신임을 발견하고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는 것은 먼저 요한이 선포한 회개와 복음은 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것으로 누가가 각색하여 설명한 종교인 세례 요한의 복음으로 바로 알 때
우리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온전한 천국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외모로 보고 판단하여 기록한 그들의 복음을 넘어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을 바로 아는 공의로 판단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음으로 바로 알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필수는 회개하라고 하실 뿐 아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도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재림이 아니라 복음의 완성시점인 성령 오심의 때를 말하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우리들이 열 두 제자로 알고 있는 그들을 부른 것도 이미 완성된 복음을 소유하여 누리며 증거할 증인을 부른 것임에도 복음의 무지로 외모로 판단하여 복음을 가르칠 제자를 부른 것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을 그대로 사실로 믿고
지금까지 복음의 완성을 위하여 재림의 때인 최후 심판의 그날이 곧 올 것이라고 착각하여 미혹함으로 결국 자신과 이 세상을 위하여 복음을 빙자하여 만든 종교가 바로 지금의 기독교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어 지금까지 가로막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예수님의 삶을 외모로 판단하여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구약을 빙자하고 각색한 대단한 종교인의 복음을 진짜 복음으로 착각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구원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정답으로 알고 있는 충효를 비롯하여 우리들이 만든 도덕천인 윤리와 도덕은 이론만 가능하지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각 개인의 행복과도 절대로 온전하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천국 복음과 이 세상을 위한 종교인의 복음도 이론만 가능하지 절대로 온전하게 공존하며 하나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회개로 인하여 이미 실패로 확정된 율법인 희년을 비롯하여 기존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종교행위로 다시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자며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발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복음인 예수는 우리 믿음의 대상인 종교가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마태와 누가의 기록에만 있는 산상수훈이란 그림도 구약의 율법과 복음을 혼합하고 각색하여 기록된 것으로 결국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기록된 지침서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포장하여 미혹함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산상수훈이 진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4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된 천국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하지 비유로 하실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복음과 상관없이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된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지만 천국은 회개하고 복음으로만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전혀 필요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지만 누구나 공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때에 따라 누구나 하나님이 있니 없니 하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는 것도 죄 없는 의인만이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도덕천을 말하는 것으로 절대 불가능한 도전이 되자 결국 스스로의 착각과 양심을 속이는 편법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는 것도 자신을 잔을 채우기 위하여 타인의 잔을 채우려고 하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바로 대단한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지만 이로서는 절대로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복음의 무지로 당근과 채찍으로 협박하며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오히려 바울처럼 대단한 종교인이 나타나 복음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그들을 복음을 가르치는 도구인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진짜 복음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주시는 빛과 소금처럼 이 세상이 이 세상을 위하여 스스로 만든 윤리와 도덕인 도덕천을 따라 각자에게 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영광이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미혹하여 결국 대단한 종교인이 되라고 유혹할 뿐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복음의 결과를 외모로 판단하여 율법의 완성처럼 착각하여 미혹하며
율법인 도덕천에 합당한 대단한 종교인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유혹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복음과 전혀 무관한 천국의 상급이란 이상한 논리를 등장시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공약이나 야망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온전한 빛이나 소금이 되는 것을 비롯하여 율법의 완성은 이론만 가능할 뿐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는 것도 복음의 무지로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최고의 종교인이 되라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는 많은 유익이 될 뿐 아니라 대단한 선생이 되겠지만 우리의 구원과 천국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바로 알 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의 기본을 넘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율법의 완성 수준인 최고 경지의 종교인이 되도록 요구하기 위하여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아주 종교심 없는 사람으로 비하하며 자신의 주장에 명분을 찾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천국을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더라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서로 사랑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여 율법을 완성한 최고 경지의 종교인인 도덕천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에 따른 착각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임이 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복음과 상관이 있으면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더 크게 울려야 함에도 또 현실에서는 그렇게 크게 울리고 있으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새로운 피조물과 피조물을 분별하지 못한 말을 함으로 결국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쇼를 하게 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 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으로 폄훼하고 빙자한 기도문으로 복음이나 증인과는 전혀 무관한 대단한 종교인을 위한 것이기에 외모인 이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합당화하고 바른 기도문 같지만
공의로 판단해보면 하나님의 뜻인 피조물의 구원 계획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는 종교인을 위한 것으로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비로소 진짜 복음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을 뿐 아니라 안전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정말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합당한 말 같지만 문제는 이 세상의 것은 절대로 하늘에 쌓아 둘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바로 알 때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고 하면서 이 세상의 논리인 외모로 예수님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천국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열거된 그림을 외모로 보면 참으로 합당한 것 같지만 공의로 보면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기록된 말처럼 한 주인만 섬기는 대단한 종교인이 되려고 아무리 발악해도 절대로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들은 꽃이나 새나 들풀처럼 그냥 왔다가 살아질 미물이 아니고 또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그런 조건으로는 절대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와 교회처럼 스스로 대단한 종교인 되어 하나님만 섬기므로 의를 구하겠다고 하거나 구한 것으로 착각하여 복을 받았다고 참담한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천지 만물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 서로 공존하며 생로병사가 일어나도록 해 놓았기에 우리들을 눈동자처럼 항상 감시하여 길흉화복을 내리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주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 하신 낙타와 부자의 비유를 정말 부자로 착각하여 부자를 악인으로 판단하여 악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을 누리는 증인의 삶이기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임에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달콤한 말로 미혹하여 이 세상의 괴로움을 피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참으로 합당하고 당연한 논리와 이론을 앞세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지금 하는 짓들을 질책한 후
복음의 무지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면서 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고 열심히 구하고 두드리는 종교인이 되는 것을 정답처럼 말하며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말에 정당성을 주장한 후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함으로
외모인 이 세상을 잣대로 보면 참으로 합당하고 대단한 주장인 그것을 참으로 믿고 지금까지 예배와 기도와 헌금을 비롯한 각종 종교행위를 정답으로 알고 열심히 달려가며 구하고 찾으려고 한 거룩한 그것이 복음인 예수가 아니라 구약인 율법과 선지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에
결국 지금까지 보여준 산상수훈의 그림은 복음인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을 혼합하여 각색한 마태의 말이고 마태의 복음으로 오히려 증인이 아닌 종교인이 되라는 것으로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며 설명하는 내용도 역시 대단한 종교인의 되는 것이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며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는 넓은 문인 구원의 길인 복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함으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한 참 복음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외모로 판단한 성경기자의 기록을 진짜 복음으로 착각하여 생과 사의 논리가 아니라 외모인 율법의 논리인 죄로 흑백을 분별하여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심판을 선포함으로 지금도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참으로 합당한 말을 참으로 아리송하게 설명하여 본질을 미혹한 후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고 예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말이 참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율법의 잣대로 분별해도 대단한 종교인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임에도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태처럼 자신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처럼 헛소리를 하고 있음으로 고)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고 하는 그림도 복음과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자신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복음이 진짜라고 미혹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달리 권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이를 위하여 예수님의 일상을 외모로 보면 복음의 본질이 아닌 치유 능력을 비롯한 기적과 이적이 대단하여 당연히 입 단속을 함에도 그 소식이 전파되는 것과 또 그 능력을 왜곡 변질하여 대단한 믿음의 종교인을 찬양하고 아브람을 복에 근원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미혹함으로
지금의 기독교와 교회처럼 그 예수 믿으면 가족이 복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처럼 구약까지 빙자하고 각색하여 기록함으로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고 하는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임에도
이를 외모로 판단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각색하여 기록함으로 참으로 외롭고 처량한 고독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대단한 종교인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미혹할 뿐 아니라
회개를 외모로 판단하여 하나님 사역의 본질인 복음이 참으로 냉정하고 비정한 고난의 길과 불효로 왜곡 변질한 후 복음의 본질과 전혀 무관한 예수님의 일상을 외모로 판단하여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대단한 능력자로 부각시켜 최고의 종교인 우상으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결국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다급한 음성을 듣기보다 외모로 보여지는 대단한 능력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가 몰살하는 너무나 참담한 현실에 오히려 공포에 휩싸여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자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어 군중 속의 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자 이를 외모로 판단한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고 의구심을 가지는 것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시면서 이런 의구심 즉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이해 가능한 능력 안에 넣으려는 도전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시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는 말보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말이 하기도 쉽고 알아듣기 쉬운 말인 줄 나도 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판단하여 의구심을 갖기보다 너희들이 나를 선생으로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 알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질책하신 후
당신께서 그렇게 한 것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외모로 판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당신의 사명은 당장 눈앞의 있는 우리들의 장애물인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인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건이 종료되자마자 지금까지처럼 변함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헛소리 하는 등 외모로 판단하던 그들의 종교인 일상으로 그대로 돌아가 그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이번에는 우리들이 제자로 알고 있는 마태인지 레위인지 한 사람을 택하여 그 집에서 사회 규법을 어기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자 이를 외모로 판단한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하는 것처럼
의구심인 악한 생각에 대하여 외모로 보면 참으로 어색한 답변인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는 것은 외모가 아닌 공의로 보면 피조물에는 건강한 피조물과 병든 피조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는 피조물이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말하는 것으로 너무나 간단 명료하고 단순한 것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며
다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시면서 당신 사역인 복음의 대상이 죄인으로 표현된 특정 피조물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죄인처럼 피조물의 한계를 안고 있기에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임을 거듭하여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자신들의 이해 가능한 능력 안에 복음을 넣으려는 도전을 위하여 악한 생각인 의구심으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하자
누구나 알고 인정할 수 있는 단순한 이 세상의 논리인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이 하고 있는 짓들이 바로 혼인 잔칫집에서 울며 금식하는 짓이고, 낡은 옷을 위하여 새 천을 절단하는 짓일 뿐 아니라 새 포도주를 곧 터질 낡은 부대에 넣어 결국 다 버리는 짓들로
모두가 말로는 구원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열심을 내고 있지만 그 결과는 패망과 실족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기에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빨리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다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보여주신 그림처럼 야이로란 이름의 관리가 찾아와 딸을 위한 간청에 따르시는 예수님의 뜻보다 사건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뒤따르는 제자나 또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목숨 건 도전을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극찬하시며 용납하는 것을 비롯하여 달리다굼 하시므로 야이로 딸의 소생을 아주 멋있고 극적으로 미화하고 각색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대단한 종교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비롯하여 야이로나 여인이 바라본 예수는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것을 위하여 달려와 따르는 것이지 공의로 판단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기 위하여 달려와 따르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마태복음에만 있는 그림으로 두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라며 따르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하는 것은 각색하여 기록한 것임으로 바로 알 때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하여 예수님 사역의 본질은 오직 피조물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에도 외모로 판단하여 가르침과 복음전파와 치유사역을 위한 것으로 미혹하여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는 명분으로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함으로
결국 외모로 판단한 예수님의 사역을 본 받아 계속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많은 종교인 제자인 추수할 일꾼을 양성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의 본질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누리는 증인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이를 제자라 하지 않고 원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더라도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제자나 사도의 개념보다 증인의 개념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권능을 주신 것은 복음이 완성되기 전이기에 증인의 훈련을 위한 것으로 바로 알 때
열두 사도로 알고 있는 그들에게 아직도 초대라는 칭호와 함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됨을 알 수 있고 또 그들 역시 복음의 무지로 외모로 판단하여 스스로 대단한 종교인이 되기 위하여 행동한 것을 참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이고
제자 파송으로 기록된 것도 그냥 둘씩 짝을 지어 세상 속으로 증인의 훈련을 위하여 보낸 것임에도 스스로 종교인 선생으로 착각한 요나같은 그들의 행동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각색하여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아직 복음이 완성되기 전이기에 증인의 삶을 훈련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있을 이 세상의 유혹에 주님처럼 정면돌파 하도록 주신 일시적 특별한 능력인 병 고침과 귀신 쫓아냄을 천국복음의 일부로 착각하여 행동하고 기록함으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며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증인의 삶을 사는 모습은 외모로 판단하여 악한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보여주신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라며 열거된 그림인 훈련 지침서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미혹하고 각색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종교인 선생의 입장으로 각색하여 기록함과 아울러 분명하게 누구든지 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나 자녀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틀과 도덕천의 잣대로 두 주인을 섬기듯이 오히려 분별함을 합리화 할 뿐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스스로 심판자로 착각하여 악을 발하는 것을 참으로 알고 기록함으로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여 가리는 것이 됨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여주시는 그림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해 보면 마지막 때와 훈련의 때에 증인과 종교인으로 해야 할 행동 지침을 혼합한 공동지침서처럼 각색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는 것은 증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불러 훈련하고 있지만 복음이 완성된 후에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증인보다 종교인의 삶을 택할 그들에 대한 주님의 심정을
외모로 판단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제자 양성의 종교인으로 착각하여 종교인의 행동지침을 말한 것으로
이에 따라 행동하므로 당연히 받는 핍박을 주님의 명령이나 당부인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여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며 증인이 아닌 대단한 종교인이 된 것을 큰 자랑으로 미혹하여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가로막고 있을 뿐 아니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고 순교로까지 포장하여 미혹하고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므로
스스로 주창하는 도덕천인 윤리와 도덕에 반하는 행위를 합리화해야 하는 스스로 모순에 빠진 답이 없는 행동을 함으로 오늘날까지 양날의 칼이 되어 세상의 칭송과 지탄을 함께 받으며 복음의 본질을 가로막고 있지만
분명하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는 것처럼 증인이란 하나님을 빙자한 자신의 자랑을 위하여 세상과 맞서 순교를 하거나 선생이 되려고 악을 발하기보다 구원받은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뿐 아니라
다시 증인의 훈련 모드로 돌아 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는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한 것처럼 곧 복음이 완성될 것이기에 제대로 훈련을 받으라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막9/38절을 보면 복음에 무지로 증인으로 택한 사람 중 요한이란 사람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을 보고 금지한 것은 오늘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목교세들과 같은 행실로 이를 인정받기 위한 요한의 주장에 대하여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고 하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으로 피조물이 그 영광에 대하여 절대로 손상하거나 덧붙일 수 없음을 모르는 무지에 따른 전혀 불필요한 짓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뿐 아니라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하시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이성과 감성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외모로 판단하여 귀신 대장인 바알세불이라 하니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귀신 졸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무의미한 것에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 말고 또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냥 두어도 그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구가 되니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럼에도 계속하여 금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너희들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 된다고 경고하시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택한 그들의 사명은 이 세상을 위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하여 그냥 그렇게 돌아가게 둔 것이라고 하는 것임에도 지금까지 이를 외모로 판단한 기존 교회와 종교인들이 자신들은 참새처럼 거래의 대상인 미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를 넘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당신의 독생자보다 더 사랑하는 걸작품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는 것도 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대단한 종교인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우리 피조물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가족을 원수로 묘사하고 있는 그림처럼 지금까지 스스로 주창하는 도덕천인 윤리와 도덕에 반하는 행위가 됨으로 이를 합리화해야 하는 스스로 모순에 빠진 답이 없는 짓을 해야 하기에 오늘날까지 양날의 칼이 되어 세상의 칭송과 지탄을 함께 받으며 복음의 본질을 가로막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는 그림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지 순교를 찬양하며 대단한 종교인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님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란 그림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로
누구든지 제자인 종교인이 되면 도덕천에 따른 이 세상의 상을 받고 증인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전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처럼 미혹하여 많은 종교인을 양성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고 표현되었지만 가르침과 전도보다 당신 사역인 복음의 완성을 위하여 당신의 길을 가고 있는데
요한이 옥에서 자신이 세례를 준 예수의 행적을 듣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천인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기에 제자를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이미 묵상한 것처럼 요한이 생각하는 회개와 복음은 진짜 회개와 복음이 아님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기자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복음의 본질이 아닐 뿐 아니라 요한을 위한 예수님의 궁색한 변명이 되는 것도 모르고 구약인 예언과 일치하기 위하여 각색하여 미혹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시는 것처럼 누구든지 외모인 도덕천의 잣대로 판단하여 실족하지 않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며 거듭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요한은 왜 광야에 나갔을까 혹시 자신을 위해서일까 그러면 너희들은 왜 나갔지 혹시 출세를 위하여 귀인을 만나려 갔으면 광야가 아니라 왕궁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구나 너희들은 선지자를 만나려 간 모양아군 그래 맞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너희 인생이 별로 변한 것 없지 않는가
그러나 당신은 그런 선지자보다 나은 자임을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란 말씀으로 증거하실 뿐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는 것은 요한은 최고의 종교인이지만 증인은 아니므로 천국에 실족함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세례 요한이 오기 까지는 너희들 스스로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율법과 선지자의 도움으로 불가능에 도전했지만 요한이 옴으로 그 모든 것이 온전한 실패로 선포되고 이제부터는 복음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이를 위하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보여주신 장터 아이들의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은 답이 없는 세상인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을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 안에서 이해하여 해석하려는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피조물의 사정이고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인 복음은 그런 평가나 조건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온전함을 말씀하시자
성경 기자는 이를 외모로 판단하여 기록한 심판의 내용은 복음을 외모로 평가한 것이기에 이 부분을 생략하고 보면 복음의 온전함을 말씀 하신 후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해야 복음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무한 신뢰를 보내며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는 그림도 피조물의 구원은 하나님은 뜻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으로만 가능함을 외모로 판단하여 종교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으로 바로 알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는 그림도
피조물의 구원인 영생을 위하여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잔을 채우려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아 내가 바로 복음이니 빨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라 그러면 너희들이 잔이 그냥 가득 채워짐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 보여주시는 그림도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여 보면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라고 시장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의 보통모습처럼 그냥 밀밭을 지나다가 의미 없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고 하는 것처럼 더 대단한 종교인임을 인정받기 위하여 외모인 율법의 잣대로 평가함에 대하여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고
역시 대단한 종교인 선생의 입장에서 정답이 없는 율법의 다른 면을 부각하여 정답처럼 항변하고 있지만 모두가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 말도 결국 정답이 아니므로 이 부분도 역시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을 외모인 율법으로 평가하여 정답처럼 합리화하여 종교인의 명분을 위하여 임으로 삽입된 것이기에 이 부분을 삭제해야 온전한 복음이 됨을 바로 알고 계속 보면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고 할 뿐 아니라
또 마가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참조하더라도 보여 주시는 그림의 본질은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고 하는 것처럼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는 구원을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율법을 따라 보여준 천국의 외모인 안식일도 결국 너희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주었지만 이제 도구가 아닌 온전하고 완벽한 본질인 내가 직접 너희들의 구원의 길로 왔으니 이미 용도 패기 된 외모인 율법으로 누가 더 대단한 종교인지 도토리 키 제기하는 악을 멈추고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철학은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는 것이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하였고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곧 사라질 신기루인 허상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음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철학은 선악과를 먹으므로 우리들이 갖게 된 최고의 이성으로 이데아를 찾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고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다신이나 무신의 종교는 우리 인간의 자성을 이데아라 하고 이를 만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유혹과 욕망과 거짓을 비롯하여 그 자성을 오염시키는 악한 것들을 온전하게 제거할 때 남는 것이나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데아이기에 오염시킨 악한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덕천으로 발악을 하고 있으며
유일신의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로 이데아이기에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오염된 악한 그것들을 죄라 하여 그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도덕천인 율법으로 발악을 하고 있기에 이름만 기독교로 다를 뿐이지 같은 종교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억지를 부리므로 오히려 스스로 모순에 빠진 참으로 우습고 부끄러운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 작금의 현실처럼 용감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하여 사랑의 이름으로 울리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인하여 오히려 드러나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실상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외모로 판단하여 서로의 불의와 불법을 지적하며 스스로 선생인 종교인이 되어 사랑과 개혁의 나팔을 불면 불수록 그 소리만 요란할 뿐 부끄러운 그 실체는 양파껍질처럼 끝없이 드러날 뿐 아니라 더 깊은 미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무지한 크리스천 종교인들이 성경과 성령 충만을 부르짖지만 성경과 성령을 공의가 아닌 외모로 판단함으로 이 세상의 구원을 고민하는 종교인과 자신의 구원을 고민하는 증인을 같은 사명인 것처럼 착각하여 신앙인이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만든 종교인 기독교를 하나님께서 주신 정답처럼 착각함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참으로 황당하고 무례한 주장인 불의와 불법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시켜 결국 스스로 답이 없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목사와 기득권 세력의 배만 채우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 때
우리들이 생각하는 신앙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그림과 무늬만 비슷하지 그 본질과 목적이 전혀 다른 종교인과 증인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종교인이란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신기루인 이 세상의 구원이란 그 자체가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유혹임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바울처럼 스스로 몸을 쳐 도덕천에 복종시킨 최고의 선생이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큰 명분으로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그 외모는 유혹으로 참으로 멋이고 대단하여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야 하는 올바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신기루요 죽은 길로써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유혹과 욕망을 펼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으로
결국 이 세상을 자신의 손안에 넣기 위하여 발악하는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는 증인의 삶도 아니고 그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자신의 자랑과 정체성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 세상 즉 스스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노예나 죽은 시체로 만드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미련한 자들이며
증인이란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은혜로 된 새로운 피조물인 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신약에 따라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받은 구원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구원받은 전후의 외모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그냥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 중심은 서로 사랑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인 만족과 충만을 누림으로 지나온 과거의 모든 것이 지금의 승리를 위한 살아있는 길로 변화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등 행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의 유혹에 넘어져 외모로 판단하거나 지난 과거를 뒤돌아 본다는 것은 승리한 산 길을 실패한 죽은 길로 만드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 누리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결국 받은 구원을 스스로 부인하는 성령훼방이 된다.
때문에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당연히 구원 받지 못한 과거의 자신인 피조물을 부인해야 하고
또 이것이 바로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하나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증인의 삶은 오직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그 행복으로 스스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자들로 당연히 각자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랑은 보이지 않고 오직 한 몸이 된 예수인 우리만 드러나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항상 깨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무엇이던지 행함에 있어 무조건 피조물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행하면 고정된 죽은 길로 가는 종교인의 것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행하면 살아있는 길로 가는 증인의 것이 될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의 선택으로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리를 바탕으로 한 교회나 성당 중심의 기독교는 증인이 아니라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고 있기에 교회와 성당에는 복음인 살아있는 예수는 없고 오직 인자로 오신 죽은 예수의 그림자와 십자가를 비롯하여
모세와 아브람과 바울과 베드로 등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교주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단의 집단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전도나, 선교나, 구제나, 봉사나. 사랑을 비롯한 사역이나,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 등의 직분이나, 예배 십일조 기도 찬송 등의 종교행사를 비롯하여 모든 것은 대단한 신앙심의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천국 증인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그들이 말하는 철학이나 종교로 이데아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 누리지 못하였기에 지금도 찾아가는 방법의 이론만 무성한 기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으로 구원에 갈급한 불안한 종교인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하게 소유한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우리 구원의 살아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으로 구원받은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한 증인의 삶을 누리는 것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정답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예수님의 유언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은 복음에 무지한 성경기자에 의하여 증인이 되라는 본질을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라는 것으로 왜곡 변질하여 기록한 것이고 또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도 증인이 되라는 것으로
마태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가고 나 대신에 보내는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받아 천국 증인으로 살아 가라는 것이고 사도행전 말씀도 율법이나 선지자나 전통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도구인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여 미혹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어디에 있던지 네가 사는 그 곳에서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 증인이 되는 것이란 명령이고 유언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완성해 놓고
그 완성의 과정과 완성한 이유와 목적을 우리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함으로 듣고 깨달아 구원도 받고 천국도 소유하여 누리라는 것일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복의 본질인 복음을 바로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며 교훈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여주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위한 실재 상황임을 깨달아 바로 알 때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원죄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그 원죄를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나 기록이 아니라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것은 구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이 죄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함으로
피조물 스스로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에덴 동산에 선악과 생명나무가 있듯이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달아 이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하면 피조물의 한계를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고
회개한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여 착하고 의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여 의롭고 온전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것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함으로 결국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겠다는 것이고
복음이란 성령님의 도움으로 구약의 본질인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겠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복음이 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은혜로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하며
신약이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의 결과로 예수님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신기루인 이 세상과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서는 절대로 온전하게 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면 받은 구원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새로운 계약으로 이를 신약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구원의 자격이 절대 미달인 피조물을 극진히 사랑하사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내려 보내 스스로 온전한 제물이 되어 드린 완전한 제사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또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죄를 없게 한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 참담한 헛소리를 믿고 그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한다는 것이 복음으로 이렇게 아무 값없이 그저 그 참담한 헛소리를 믿고 영접하므로 구원을 준다고 은혜라는 것은 정말 복음의 무지로 인한 심각한 오류요 착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죄가 깨끗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미혹하기 위하여 교회와 성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속성에 반하는 답이 없고 끝이 없는 엉터리 회개와 구원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세례를 받는 순간 확정되었지만 주님의 재림 때까지 아직 미완이란 어색한 말로 미혹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되라고 강요함으로 결국 구원이 은혜가 아님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 되자
이 사실까지 미혹하기 위하여 다시 이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의 마땅한 사명처럼 미혹시켜 불가능의 도전으로 내몰고 있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증인의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어느 누가 감히 그리스도 같이 되는 합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요구하는 외모를 따른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바울을 비롯한 종교인 선배들이나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 몸을 쳐 발악하는 자유와 쉼 없는 고난의 삶으로 이 불가능에 도전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쌓인 내공의 외모가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게 보일 뿐 아니라 세상의 칭송도 받으니 진짜처럼 착각하여 도전하며 살거나, 선생이 되어 강요하거나, 또는 그렇게 사는 척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색하고 불완전한 구원은 온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이 은혜라고 하면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랑처럼 스스로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는 말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빚진 것이 됨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 때
은혜로 미혹하고 있는 십자가의 사건은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언약인 구약을 따라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구원을 받도록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 당신의 일이었지 우리들이 일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은혜인 진짜 이유는 바울의 말이나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처럼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충만하게 채워 구원받은 합당한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또 다른 불가능인 우리의 숙제를
우리의 회개를 온전한 구원의 자격과 조건으로 인정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구원을 단번에 완성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그냥 우리의 숙제가 해결되어 이를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가 아니라 소유한 자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주님 재림 때까지 아직 아닌 어색한 구원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벽한 구원이기에 구원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나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 진짜 은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천국은 새로운 약속인 신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수까지 받은 구원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도 바울이 말처럼 도덕천에 따른 의로운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받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비슷한 천국까지 맛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천국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니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사건인가
그래서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진짜 은혜요 온전한 구원이기에 이 기쁨을 누구도 뺏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고 자유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또 당신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며 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임으로 바로 알 때
마태복음11장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8절의 “오직” 이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구원을 두고 당신이 바로 복음임을 말한 것이고
아직도 우리들이 스스로의 위로와 자랑을 위하여 오남용하고 있는 여호와 이레란 말의 의미도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복음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유익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받은 구원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이전 육신을 입고 신기루요 허상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 온전함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며 이를 위하여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구원과 천국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를 소망이라 하고
또 피조물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아직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 있는 신기루인 이 땅에서는 믿음으로 밖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밖에 없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한 것이며
신약인 새로운 약속을 따라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인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해야 가능하지만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믿음 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므로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고 행복하게 잘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두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한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명령하고 또 강조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경의 외모인 이 세상을 위한 도덕천을 따라 모범이 되는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이 세상에 성공한 영웅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게 보여
진리의 달인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기 위하여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의 외모를 따른 사랑을 위하여 조건과 자격을 갖추려고 발악하다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여 구원에 실족하고 있음을 바로 알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복음을 가르치는 도구인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를 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게 누리는 증인의 삶을 통하여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율법을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가인과 아벨(셋), 아브람과 롯,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비롯하여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의 잣대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바울은 딤후3장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함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 받은 것임을 알게 한다 라는 의미를 조금 부족하지만 잘 말해놓고
다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이 신기루인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도덕천을 따른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미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종교인 선배들과 아직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판단함으로 입으로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제사나 예배나 기도나 헌금을 비롯하여 착하고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여 강요하며
자신의 배와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구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복음의 예수는 우리 각자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길로 도덕천을 따라 우리들이 길로 인식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고정된 공통의 길인 율법이나 규례처럼 죽어있는 길이 아니라
살아있는 각자의 길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언제나 바른 길이 될 뿐 아니라 외모로 보면 길이 없고 아닌 것 같지만 이성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다 길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리므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 살아있는 각자의 길로 가야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너와 나의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을 옮기지 않는 것이 됨을 바로 알 때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울처럼 서로에게 부모나 선생이 되는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인의 조건과 환경을 갖추려고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실족하여 죽자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경고를 따라 선생이 아니라 천국 증인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은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 뿐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받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며 천국과 가장 비슷하게 누리는 것이 되므로 신나고 행복하여 날마다 감사하며 달려갈 수 있을 것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증거하며 또 그 동안 우리들의 미혹된 사실들을 깨워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창세기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던 원죄의 논리는 도덕천인 외모에 따라 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한 것으로 복음의 첫 단추부터 아주 잘못된 심각한 오류임을 고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의 죽음은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외모처럼 원죄를 비롯하여 죄의 결과가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당연히 죽는 것을 도덕천의 잣대로 판단하여 죄로 죽는 것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뱀의 유혹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 이를 원죄로 미혹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피조물이 선악과를 먹고 그 지혜를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허락하신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선악과는 허락하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피조물이란 그 자체가 온전한 영생의 생명나무 실과를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래도 먹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체가 드러나 죽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피조물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영생할 수 없다는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은혜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자유의지를 따라 피조물의 참 복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를 하기보다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녀를 낳기 시작하고 이 세상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그것이 복처럼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복의 제목들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도전인 불의와 불법임을 바로 알 때
외모로 보이는 성경 기록이 스스로 모순 속에 빠져 있음이 오히려 당연할 뿐 아니라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선과 악을 가로수로 사용하여 고정된 죽은 길을 만들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지만
야보고서 1장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에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복의 본질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에 피조물의 착하고 선한 도덕적인 어떠한 행위도 절대로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하여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는 회개를 한 후 복음의 실체인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셋이 아들을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천으로 말하고 있는 나의 하나님인 이 세상의 유혹이고 우상임을 바로 알 때
아브람 자체가 복이나 복의 근원이 절대 아닐 뿐 아니라 허락한다는 복의 제목들을 비롯하여 결혼이나 자녀도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에 뜻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불의와 불법임에도 복으로 착각하여 갈망하기에 복인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공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요셉의 실체도 이 세상의 이치와 유익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명철하고 지혜로워 그렇게 된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에
그런 요셉이 한 일의 결과는 애굽의 번영과 애굽 신의 입지를 더욱더 탄탄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요셉 자신의 부모 형제를 430년의 노예생활로 이끈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으로 이 세상의 유혹일 뿐 아니라 주겠다고 하는 복의 내용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인 구원이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의 자랑으로 유혹이며
약속한 가나안 땅도 천국의 예표가 아니라 이 세상 성공의 예표로 외모가 너무 멋이고 대단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가나안에 입성한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이를 증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기록의 대부분은 결과를 두고 이 세상의 관점인 외모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모가 아닌 공의로 다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직접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됨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는 경고 말씀을 감사하게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다르게 생각하라고 주창하고 실천함으로 이 세상의 변화에 대단한 역할을 한 스트브 잡스가 하나의 교주처럼 세상의 칭송을 받지만 그 결과는 우리들을 컴퓨터나 스마트 폰의 노예로 만든 것처럼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으로 구원하려고 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아브람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우리들을 복의 노예로, 율법으로 구원하려고 한 모세는 율법의 노예로, 복음으로 구원하려고 한 바울은 복음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과 복음의 무지로 그들에게 미혹된 크리스천 종교인 지도자들도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정의와 착함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히려 그것들의 노예로 만들었고
또 그들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영웅호걸들은 때를 잘 만나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잠시 성공한 것일 뿐이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구원을 소유하여 누린 승리한 증인이 아니기에
사도행정4장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실 뿐 아니라 로마서 3장10절에서도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인 복음에 무지하여 유혹인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신기루를 잡으려고 열심히 달려감으로 성공처럼 보이거나, 그러다 지쳐 그 유혹의 요구를 외면하려고 스스로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우울 속에 빠지거나
또는 포기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다 신기루 같은 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보들의 행진으로 그 마지막은 언제나 영원한 멸망뿐임을 바로 알 때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 때
성경기자나 초대교회 사도를 비롯하여 과거의 틀이나 오류에서 벗어나 지금 바로 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살아있는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행복한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은 우리들의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릴 수 있음을 바로 알 때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어 신기루 구원을 잡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신기루 신앙심을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고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다가 때가 지난 후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어리석음도 행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감사하기보다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사역을 분별하지 못한 복음의 무지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정말 깊이 명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하심을 받음으로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의 실체인 율법 즉 도덕천의 판단에 따라 이 세상과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조건과 자격의 유혹에서 벗어난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서로를 구원받은 온전한 승리자로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혼자만 승리자가 되기 위한 오만과 착각으로 이미 지난 불확실한 상대방의 과거나 도덕천을 따른 외모인 유혹으로 판단하여 지적하는 무례함은 스스로 심판자기 되어 상대방을 실패자나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려는 불의와 불법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살아있는 생명의 길을 두고 사망의 음침한 죽은 길로 가는 것으로 결국 함께 실족하여 죽자는 것일 뿐 아니라 동일한 잣대로 자신을 돌아보면 유혹의 실체처럼 상대방보다 더 추악한 악취와 죄악에 빠진 자신의 민망하고 부끄러운 실체를 망각한 참으로 한심한 작태로
성령님의 가르침과 요구를 따라 서로를 하나님으로 믿고 서로 사랑하기로 한 약속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회개와 복음을 거부하는 것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구원에 실족하는 유일한 지름길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가 아닌 외모로 판단하면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복음의 본질처럼 착각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기 위하여 평안과 자유가 없는 불안한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종교인의 행위로 영원히 구원에 도달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과 목교세들의 주장으로 불의와 불법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할 때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으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아무리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여 구원을 이룰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도 없기에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아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증인의 삶이 바로 행복임을 비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요한복음16장에서 분명하게 우리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보여주신 그림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이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인자로 오신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을 보내주겠다고 하시며 그가 와서 당신을 믿지 않은 죄가 무엇인지 당신의 사역을 완성됨으로 이제 보지 못하는 의가 무엇인지 그로 인하여 이 세상 심판을 받았기에 세상을 책망하겠다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고 하시며
또 이를 위하여 설명할 것이 많지만 우리들의 한계로 인하여 말하지 못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그것도 스스로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인 하나님의 뜻만 말한다고 함으로 성령님 외에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온전하지 못함을 반증해 주시며
또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역으로 구원계획의 완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로 인하여 처음에는 우리들이 곡하고 애통하며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곧 우리의 근심이 기쁨이 될 뿐 아니라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그날에는 아무것도 질문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즉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였으나 복음이 완성된 그때부터 구하면 구원을 받게 되고 그렇게 받은 구원으로 인하여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령님을 도움으로 해야 할 것이 병 고침을 비롯하여 신기루로 곧 사라질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당신을 믿지 않는 죄로 표현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라는 구약의 본질과
인자의 예수가 복음의 예수로 됨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완성된 복음이 바로 의이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과
하나님의 뜻인 구약과 신약이 모두 완성됨으로 신기루인 이 세상이 곧 사라질 심판을 알게 함으로 우리 각자는 빨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천국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한 종교 행위로 인하여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신기루로 헛된 이 세상의 정의와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한 종교행위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착하고 선하게 보이므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처럼 미혹하는 불의와 불법으로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하는 이 땅의 모든 교회에는
살아있는 복음인 예수는 없고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으로 스스로 교주가 된 아브람과 모세와 바울과 베드로 비롯하여 대단한 신앙심의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들만 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몸인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가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인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
이를 위하여 꼭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율법이나 선지자나 십자가를 비롯하여 성전, 제사장,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희년 등과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어떠한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나 여러 가지 법과 제도는 절대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라 종교인을 양성하는 하나의 종교행위로 신기루인 이 세상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을 전부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만 사랑함을 이미 태초에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완성하시고 천국을 소유할 유일한 길인 복음을 주신 것으로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인을 종교인의로 왜곡 변질하는 기록인 된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말씀을 비롯하여 비슷한 기록의 문자를 외모로 판단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미혹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억지를 부리며 하나님을 빙자하여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함으로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채우는 종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너무나 심각한 불의와 불법일 뿐 아니라 절대 실현 불가능한 도전임을 바로 알 때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구원)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신약으로
이는 곧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도와 선교를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어디에 있던지 현재 있는 위치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누리는 천국 증인이 되리라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이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며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날마다 확인하는 살아있는 길로 가는 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이며 사명으로 이를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실체는 언제나 지난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현재와 미래인 천국만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 항상 깨어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스스로 점검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과 사명을 따라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자격과 조건에 미혹되어 시기하고 질투하다 시들어가는 꽃이 되는 자신의 발견 할 때는 빨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부인해야 극복할 수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경고처럼 도덕천에 따른 종교인이 되어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울리는 신기루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된 나와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을 말하며
또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임을 바로 알고
그렇게 서로 사랑을 하면 요한복음14장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는 나에게 완성되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내가 나에게 당당하게 선포함으로
구원받아 예수님의 몸이 된 새로운 피조물임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 수 있게 됨으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현실이 되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기보다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직접 누리므로 구원을 확인하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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