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마태복음17장1~13절 말씀 중에서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아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천국의 증인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증거해야 할 증인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후 이제 그 증언의 대상으로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멋있고 대단한 것인지 스스로 느끼게 함으로 스스로 그 천국을 소망하게 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함으로 온전한 천국 증인이 되는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증거해야 할 실체인 천국을 직접 보여주어야 함에도 보여주지 않고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하여 희미하게 보여주시는 것은 천국은 우리 피조물이 지금까지 절대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임을 먼저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보여 주시는 비유들을 피조물의 수준 안에서 이해하려고 악과 음란을 발하기보다 보여주시는 그림을 따라 부족하나마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모든 비유가 말하고 있는 그 천국을 희미하게나마 느끼려고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희미하게나마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이 세상을 부인하는 회개를 할 만큼 절대 경쟁력이 있는 것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또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라는 그림은 예수님을 대단한 종교인 선생으로 미혹하기 위한 조작된 그림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증인의 모본을 보여주신 후 이제 증언해야 할 대상인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그 증인은 군중인 큰 무리가 아니라 바로 증인으로 택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쇼를 삭제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바로 보면
천국의 실체를 보여주시기 위한 많은 비유 중 그 하나로 보여주신 씨를 뿌리는 비유는 천국은 “더러는” 이란 말처럼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피조물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을 비롯하여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을 뿐 아니라 삼십, 육십 백배는 정말 결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처럼 피조물의 한계와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변화가 일어남을 말하는 것이기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매달리고 있는 종교처럼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비롯하여 외모나 의지 그리고 오복이나 칠복처럼 외모에 따른 이 세상의 결실이 전혀 무의미함을 천국을 소망하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함에도 복음에 무지한 성경기자가 자신들의 목적인 이 세상을 위한 종교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한 말을 대중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미혹하여 위하여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라고 종교인의 논리로 쿵짝을 맞추고 각색하여 조작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할 뿐 아니라
구약인 이사야의 말을 외모인 종교인의 수준으로 판단하여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고 참담한 헛소리를 하며 또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비유로 하신 본질을 억지로 미혹하며 복의 본질까지 왜곡 변질하고 있지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찾고 구하는 것이 구원이고 천국임으로 바로 복음이신 예수임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 말의 외모를 추구하므로 그것을 소유한 증인이 되기 보다 그것을 따르는 종교인이 되어 지금도 악과 음란을 발하는 모습들이 바로 지금의 교회와 종교인의 모습임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비유 자체가 설명한 것처럼 외모로 보면 특별하게 어려운 내용도 비밀도 아니기에 굳이 이렇게 다시 설명하는 쇼를 할 필요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 설명도 천국의 모습이나 소유하는 방법도 아니고 오직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오히려 천국을 향한 상상을 나래를 꺾는 불의와 불법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님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보여주신 후 이렇게 설명하는 쇼를 하기보다 증인으로 선택된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기를 기대하며 계속하여 천국을 보여주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 하셨을 것이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보여주신 비유를 천국보다 이 세상을 위한 종교인 선생이 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각 안에 그들의 천국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악과 음란을 행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마태 복음서에만 기록된 가라지 비유는 엄밀하게 보면 이는 좋은 씨를 뿌려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천국 복음이 아니라 종교를 위하여 도덕천에 따른 심판을 빙자하여 좋은 열매로 표현된 대단한 종교인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으로 무시해야 하고
겨자씨와 누룩비유를 한 후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고 하시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첫 번째 보여주신 씨 뿌리는 비유처럼 천국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나게 좋고 유익한 변화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라고 하는 것임에도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이번에는 시편78/2절의 말씀을 빙자하여 비유의 본질을 왜곡 변질 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이 가라지 비유를 진짜로 알고 세뇌되어 따라왔지만 이미 묵상한 것처럼 쇼로 분위기를 잡고서도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가라지 비유만 설명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 내용도 복음이 아니라 좋은 씨를 뿌려 좋은 결실을 거두는 도덕천에 따른 심판을 무기와 도구로 사용하여 종교와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당연히 무시하고 보면
계속하여 보여주시는 보화나 진주의 비유처럼 천국은 지금 당장은 분명한 가치를 평가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도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구입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고 유일한 것으로 결국 이 세상을 살면서 그 천국만 소유하면 이 세상을 잘 산 것이 되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이며
또 천국을 그물 안에 든 물고기비유처럼 바로 보기만 하면 좋은 것 때문에 좋지 못한 물고기를 버리는 것처럼 천국을 위하여 자신과 이 세상을 부인하는 회개를 스스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시는 것을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다시 도덕천의 잣대로 설명하여 심판을 선포함으로 결국 천국을 가로막는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피조물들은 지금까지 보여주신 비유를 통하여 희미하게나마 천국에서 너무나 멋있게 변화될 각자 자신의 모습에 대한 소망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그 보화 같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하시며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도덕천을 따라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아리송한 말씀의 본질은 기록된 것처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인 선생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 값을 알 수 없는 최고 가치의 보화를 소유한 것처럼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두 주인인 새것과 옛 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것과 옛 것의 주인인 예수가 되어 누리는 증인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그림처럼 선택된 그들과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것처럼 복음을 율법으로 이해하려고 예수님을 외모인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비정상이라고 배척할 뿐 아니라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하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깨닫기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신 것처럼 구약을 빙자하여 도덕천의 잣대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며 오히려 심판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배척한 것을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선자자들이 도덕천인 율법을 위하여 죄에 대한 회개를 선포하다 배척 당한 것과 같은 것으로 미혹하는 것이고
또 복음과 증인의 모본을 위하여 그냥 지나간 것을 그들을 정죄하며 능력을 행하지 아니한 것으로 미혹하는 것으로 결국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변질하는 불의와 불법이 됨을 바로 알 때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고 하는 것처럼 헤롯 왕과 그 신하들도 복음을 세례 요한이 추구한 율법인 도덕천으로 이해하려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한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을 위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기 위하여 받은 권능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 오히려 도덕천인 율법을 따라 자신의 대단한 종교심을 위하여 선생이 되려고 사용하다 죽었기에 결국 요한 스스로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기보다 가로막은 것이 되지만
온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지금 우리들이 복음을 만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당신에 의해서 당신의 뜻대로 결국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한 것이 되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여주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마다 공히 기록된 것으로 그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 먼저 요한복음 5장을 참고해보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증언)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증언)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하시는 것처럼
나도 선지자들이나 너희들처럼 내 생각과 내 뜻대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싶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이고 진리이심을 알기에 그의 뜻대로 복음이 된 나는 당연히 참이고 진리로 의롭기에 너희들의 구원에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라고 하시는 것처럼
이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요한이 증거한 후 이 세상인 너희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도덕천에 따른 회개를 주장함으로 너희들의 대단한 선생이 되어 잠시 비추다 살아졌지만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너희들에게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받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어떻게 되었기에 도무지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악하고 음란한 생각만 하느냐고 하시며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시는 것처럼 어떻게 말과 행동은 영생을 위하여 열심히 달려 간다고 하는데 그 결과는 점점 더 멸망을 향하여 달리고 있냐고 안타까워하시며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하시는 것처럼
너희들에게 너희들이 꿈꾸는 진짜 복인 영생이 아니라 너희들이 알 수 있는 신기루 같은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의 복이란 것으로 너희들을 불렸다면 아마 자다가도 달려 왔을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진짜 복이 아니기에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너희가 되라는 증인은 되지 않고 종교인이 되어 서로 칭찬과 시기로 미혹하며 신기루인 멸망을 향하여 열심히 따라 달려가고 있음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희들이 목숨 걸고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율법이 고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율법이라도 제대로 알았으면 율법은 처음부터 그것을 말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율법)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시는 것처럼 또 지금까지 우리들이 묵상한 것처럼 복음을 복음으로 바로 보지도 못하고, 율법을 율법으로도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복음을 어설픈 율법인 도덕천인 외모로 판단하려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한탄하시며
그래도 제자들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것이지 무리들이 따르는 것을 피하여 다닌 예수님께서 기록된 것처럼 오히려 무리를 선동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시킬 수 있도록 굳이 무리의 배고픔을 억지로 해소하려고 행하신 기적이 아님을 먼저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 것은 그래 지금까지 비유로 보여준 천국을 어떻게 알고 있지 라는 질문이고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고 답하는 것은 아직도 천국을 도덕천인 율법으로 판단하여 이해하려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기에
그들이 말한 오병이어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는 것처럼 이렇게 엄청나게 멋있는 변화가 있는 그것이 바로 천국임을 증인으로 택한 그들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임에도 이를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판단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미혹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보여 주시는 그림처럼 오병이어가 군중이 아니라 택한 증인들을 위한 것이기에 목적 달성 후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고 일상으로 돌아오신 것이며 또 일부러 택한 그들과 떨어져
바다 위를 걸어오는 이적의 쇼를 연출하신 것도 계속하여 택한 그들에게 천국은 이 세상처럼 고정된 길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길로 다니는 것임을 보여주시자
이에 베드로가 용감하게 살아있는 길에 도전했지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는 것처럼 그냥 누리기보다 이해하려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실족한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임에도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하는 것이나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님을 도덕천을 따른 대단한 선생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포장으로 스스로 표적을 만들고 있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들을 합리화하고 있는 기록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단한 종교인 선생으로, 증인으로 택한 그들을 제자로 착각하여 장로들의 전통인 바른 종교인이 되는 규례로 판단하여 이해함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이에 대하여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된 이 말은 참으로 어색할 뿐 아니라 모순이 되는 이상한 답변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질문과 답변 모두 도덕천인 율법을 기초한 것으로 서로 범하는 개념이 아닐 뿐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합당한 바른 종교인의 모습인가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래 이어진 그림처럼 절대로 그들의 선생이 되어 가르치기 위하여 정답이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잘 포장하여 그렇게 설명하기보다 그냥 당신의 길을 걸어갔을 것임에도
너무나 자세하고 잘 설명한 것으로 미혹하여 기록한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최고의 종교인 선생이 되길 바라는 증인으로 택한 그들과 성경기자의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고르반으로 알고 있는 그림도 우리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율법을 기초하여 어느 것이 더 바른가 하는 것으로 결국 정답이 너무 많아 정답이 없는 율법의 한계요 실체임에도
바른 종교인이 되라는 이사야의 말로 성경 기자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할 뿐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 둘 다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라고 스스로 착각하여 쇼를 하며
예수님을 빙자하여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복음과 전혀 무관한 심판으로 위협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라는 추임새로 박자를 맞추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하시는 것으로 멋있게 포장하여 설명하며 정답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라 대단한 종교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 아니라 살아있는 길을 가는 증인이나 천국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자 그림의 실체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보다 당신이 소문대로 정말 능력이 있다면 귀신들린 내 딸을 고쳐보란 기대와 조소가 섞인 외침에 당연히 무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택한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체면을 위하여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제발 고쳐주시란 간청에 대하여 복음에 무지함을 꾸짖으며 그냥 당신의 길을 가신 것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억지로 포장하여 기록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그런 무반응에 오히려 자극을 받은 여자가 적극적으로 매달리자 그냥 고쳐준 것으로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인 복음과는 무관한 일상의 한 모습임에도 이를 도덕천인 율법으로 포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보다 이 세상인 우리를 더 사랑한다고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하던 주장은 어디로 살아지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으로 미혹하여 기록한 것은 스스로 모순으로 우스운 모습이며
또 갈리리 호숫가에서 여럿 장애인을 고치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그림도 당신 사역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히려 황당하게 조작 기록된 것이며
또 무리들을 피하여 다니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인 복음을 위하여 무리들과 사흘 동안 함께 있어야 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혹하여 기록한 칠병이어의 그림은
오병이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성경기자가 오병이어를 모방하여 예수님을 대단한 종교인 선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조작하여 기록한 것으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가리는 심각한 불의와 불법이 됨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기에
계속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라는 그림이 바로 또다른 모습으로 포장된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것은 표적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이성과 감성으로 분별하거나 이해할 수 있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는 그림에서 복음의 무지로 첨가된 요나의 표적이란 말을 빼고 보면
천국은 너희들의 한계로 인하여 비유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표적이나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하여 소유하려고 하면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천국을 가로막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 된다고 하신 후
거듭하여 표적의 실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당신 말씀의 본질을 택한 그들이 이 세상의 삶을 위한 떡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복음의 무지로 표적인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능력으로 착각한 엉뚱한 설명을 덧붙여 미혹함으로 복음과 천국의 본질을 가리고 있음을 바로 알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의미가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교훈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회개하기보다 율법을 따른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표적을 찾거나 발악하는 택한 그들을 비롯하여 외모인 이 세상을 추구하는 삶인 모든 종교인과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리가 아니라 택한 그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율법인 도덕천의 판단으로 최고의 종교인으로 본다고 답변하자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에
그 유명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표현된 것처럼 베드로가 예! 당신은 바로 복음입니다 라고 하므로 결국 복음을 증언하자 드디어 증인으로 세워진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는 것처럼 그래 정말 잘했고 대단하구나 하지만 너의 이 증언은 표적을 쫓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의 결과인 피조물인 너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심을 잊지 말라고 하시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표현된 것처럼 이름의 의미까지 칭찬하시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너의 그 증언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표적인 종교를 통하여 구하려고 발악하고 있는 바로 그 정답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시는 것임에도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라는 것처럼 베드로에게 특별한 능력이 임한 것처럼 증인이 아니라 대단한 종교인으로 미혹하여 기록할 뿐 아니라
베드로 자체는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피조물임을 명심하여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어야 함을 강하게 당부하고 있음에도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는 것처럼
택한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비밀과 능력을 소유한 기득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여 기록함으로 지금까지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여 증인이 아니라 종교인을 양육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베드로의 그 증언이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증인으로 증언한 것이 됨으로 결국 증인이 완성되었기에 이때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복음 사역을 보여주시자 다시 종교인으로 돌아온 베드로가 이를 외모로 판단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도 냉정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는 것처럼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꾸짖으며
다시 원점에서 복습하기 위하여 우리 피조물의 목적과 사명은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회개하고 복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뿐이라고 하시는 것까지 외모로 판단하여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복음의 무지로 도덕천의 심판을 선포하며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는 것처럼
심판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함으로 결국 우리들이 초대교회라고 하는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의 본질이 복음의 완성과 성령의 오심을 말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보여주시는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는 그림도 누가는 팔일 쯤 이라고 기록했으니 곧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택한 그들에게 좀더 분명한 천국을 보여주기 위하여 신비롭게 변형이 되신 것임에도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고 하는 것처럼
증인에서 종교인으로 돌아와 바로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판단하여 해석함으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것을 크리스천 종교인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이 꿈꾸는 대단한 헌신이요 충성된 종교인의 모습이지만
이것이 바로 종교인으로 돌아온 베드로의 모습처럼 사탄이 되어 하나님의 일인 복음보다 사람의 일인 종교를 위하여 복음을 가리는 짓이기에 사탄아 물러 가란 질책을 받은 것을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고 미혹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심히 두려워한 것이며 아쉽지만 이것으로 또 한번의 천국 보여주기 훈련을 마친 것임에도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라는 것은 특별한 비밀이나 능력을 가진 대단한 종교인의 기득권을 가진 것으로 미혹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종교를 위하여 복음과 천국을 표적이고 외모인 율법으로 판단하여 이해하려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철학은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는 것이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하였고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곧 사라질 신기루인 허상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음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철학은 선악과를 먹으므로 우리들이 갖게 된 최고의 이성으로 이데아를 찾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고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다신이나 무신의 종교는 우리 인간의 자성을 이데아라 하고 이를 만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유혹과 욕망과 거짓을 비롯하여 그 자성을 오염시키는 악한 것들을 온전하게 제거할 때 남는 것이나 도달하는 것이 바로 이데아이기에 오염시킨 악한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덕천으로 발악을 하고 있으며
유일신의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로 이데아이기에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오염된 악한 그것들을 죄라 하여 그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도덕천인 율법으로 발악을 하고 있기에 이름만 기독교로 다를 뿐이지 같은 종교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억지를 부리므로 오히려 스스로 모순에 빠진 참으로 우습고 부끄러운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 작금의 현실처럼 용감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하여 사랑의 이름으로 울리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인하여 오히려 드러나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실상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외모로 판단하여 서로의 불의와 불법을 지적하며 스스로 선생인 종교인이 되어 사랑과 개혁의 나팔을 불면 불수록 그 소리만 요란할 뿐 부끄러운 그 실체는 양파껍질처럼 끝없이 드러날 뿐 아니라 더 깊은 미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무지한 크리스천 종교인들이 성경과 성령 충만을 부르짖지만 성경과 성령을 공의가 아닌 외모로 판단함으로 이 세상의 구원을 고민하는 종교인과 자신의 구원을 고민하는 증인을 같은 사명인 것처럼 착각하여 신앙인이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만든 종교인 기독교를 하나님께서 주신 정답처럼 착각함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참으로 황당하고 무례한 주장인 불의와 불법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시켜 결국 스스로 답이 없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목사와 기득권 세력의 배만 채우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 때
우리들이 생각하는 신앙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그림과 무늬만 비슷하지 그 본질과 목적이 전혀 다른 종교인과 증인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종교인이란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신기루인 이 세상의 구원이란 그 자체가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유혹임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바울처럼 스스로 몸을 쳐 도덕천에 복종시킨 최고의 선생이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큰 명분으로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그 외모는 유혹으로 참으로 멋이고 대단하여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야 하는 올바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신기루요 죽은 길로써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유혹과 욕망을 펼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으로
결국 이 세상을 자신의 손안에 넣기 위하여 발악하는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는 증인의 삶도 아니고 그저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자신의 자랑과 정체성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 세상 즉 스스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노예나 죽은 시체로 만드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미련한 자들이며
증인이란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은혜로 된 새로운 피조물인 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하여 신약에 따라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받은 구원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구원받은 전후의 외모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그냥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 중심은 서로 사랑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인 만족과 충만을 누림으로 지나온 과거의 모든 것이 지금의 승리를 위한 살아있는 길로 변화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등 행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의 유혹에 넘어져 외모로 판단하거나 지난 과거를 뒤돌아 본다는 것은 승리한 산 길을 실패한 죽은 길로 만드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 누리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결국 받은 구원을 스스로 부인하는 성령훼방이 된다.
때문에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당연히 구원 받지 못한 과거의 자신인 피조물을 부인해야 하고
또 이것이 바로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하나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증인의 삶은 오직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그 행복으로 스스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자들로 당연히 각자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랑은 보이지 않고 오직 한 몸이 된 예수인 우리만 드러나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항상 깨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무엇이던지 행함에 있어 무조건 피조물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행하면 고정된 죽은 길로 가는 종교인의 것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의 입장에서 판단하여 행하면 살아있는 길로 가는 증인의 것이 될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의 선택으로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리를 바탕으로 한 교회나 성당 중심의 기독교는 증인이 아니라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고 있기에 교회와 성당에는 복음인 살아있는 예수는 없고 오직 인자로 오신 죽은 예수의 그림자와 십자가를 비롯하여
모세와 아브람과 바울과 베드로 등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교주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단의 집단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전도나, 선교나, 구제나, 봉사나. 사랑을 비롯한 사역이나,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 등의 직분이나, 예배 십일조 기도 찬송 등의 종교행사를 비롯하여 모든 것은 대단한 신앙심의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천국 증인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그들이 말하는 철학이나 종교로 이데아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 누리지 못하였기에 지금도 찾아가는 방법의 이론만 무성한 기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으로 구원에 갈급한 불안한 종교인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하게 소유한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우리 구원의 살아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으로 구원받은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한 증인의 삶을 누리는 것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정답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예수님의 유언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은 복음에 무지한 성경기자에 의하여 증인이 되라는 본질을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라는 것으로 왜곡 변질하여 기록한 것이고 또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도 증인이 되라는 것으로
마태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가고 나 대신에 보내는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받아 천국 증인으로 살아 가라는 것이고 사도행전 말씀도 율법이나 선지자나 전통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도구인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여 미혹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어디에 있던지 네가 사는 그 곳에서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 증인이 되는 것이란 명령이고 유언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완성해 놓고
그 완성의 과정과 완성한 이유와 목적을 우리 피조물이 알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설명함으로 듣고 깨달아 구원도 받고 천국도 소유하여 누리라는 것일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라도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복의 본질인 복음을 바로 깨달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며 교훈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여주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를 위한 실재 상황임을 깨달아 바로 알 때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원죄란 이름으로 미혹하여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그 원죄를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나 기록이 아니라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것은 구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이 죄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함으로
피조물 스스로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에덴 동산에 선악과 생명나무가 있듯이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달아 이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하면 피조물의 한계를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고
회개한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하여 착하고 의로운 삶에 다시 도전하여 의롭고 온전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것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개함으로 결국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겠다는 것이고
복음이란 성령님의 도움으로 구약의 본질인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겠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복음이 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면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은혜로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하며
신약이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의 결과로 예수님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신기루인 이 세상과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서는 절대로 온전하게 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면 받은 구원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새로운 계약으로 이를 신약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구원의 자격이 절대 미달인 피조물을 극진히 사랑하사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내려 보내 스스로 온전한 제물이 되어 드린 완전한 제사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또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죄를 없게 한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이 참담한 헛소리를 믿고 그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한다는 것이 복음으로 이렇게 아무 값없이 그저 그 참담한 헛소리를 믿고 영접하므로 구원을 준다고 은혜라는 것은 정말 복음의 무지로 인한 심각한 오류요 착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구원받았다는 우리의 죄가 깨끗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을 미혹하기 위하여 교회와 성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속성에 반하는 답이 없고 끝이 없는 엉터리 회개와 구원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세례를 받는 순간 확정되었지만 주님의 재림 때까지 아직 미완이란 어색한 말로 미혹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되라고 강요함으로 결국 구원이 은혜가 아님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 되자
이 사실까지 미혹하기 위하여 다시 이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의 마땅한 사명처럼 미혹시켜 불가능의 도전으로 내몰고 있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증인의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어느 누가 감히 그리스도 같이 되는 합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요구하는 외모를 따른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바울을 비롯한 종교인 선배들이나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 몸을 쳐 발악하는 자유와 쉼 없는 고난의 삶으로 이 불가능에 도전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쌓인 내공의 외모가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게 보일 뿐 아니라 세상의 칭송도 받으니 진짜처럼 착각하여 도전하며 살거나, 선생이 되어 강요하거나, 또는 그렇게 사는 척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색하고 불완전한 구원은 온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이 은혜라고 하면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랑처럼 스스로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는 말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빚진 것이 됨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 때
은혜로 미혹하고 있는 십자가의 사건은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언약인 구약을 따라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구원을 받도록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 당신의 일이었지 우리들이 일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은혜인 진짜 이유는 바울의 말이나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것처럼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충만하게 채워 구원받은 합당한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또 다른 불가능인 우리의 숙제를
우리의 회개를 온전한 구원의 자격과 조건으로 인정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구원을 단번에 완성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그냥 우리의 숙제가 해결되어 이를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가 아니라 소유한 자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주님 재림 때까지 아직 아닌 어색한 구원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벽한 구원이기에 구원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나 조건이 아무것도 없는 진짜 은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천국은 새로운 약속인 신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수까지 받은 구원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도 바울이 말처럼 도덕천에 따른 의로운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받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비슷한 천국까지 맛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천국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니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사건인가
그래서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진짜 은혜요 온전한 구원이기에 이 기쁨을 누구도 뺏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고 자유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또 당신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며 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임으로 바로 알 때
마태복음11장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8절의 “오직” 이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구원을 두고 당신이 바로 복음임을 말한 것이고
아직도 우리들이 스스로의 위로와 자랑을 위하여 오남용하고 있는 여호와 이레란 말의 의미도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복음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유익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받은 구원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이전 육신을 입고 신기루요 허상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그 온전함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며 이를 위하여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구원과 천국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를 소망이라 하고
또 피조물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아직 이전 피조물의 육신을 입고 있는 신기루인 이 땅에서는 믿음으로 밖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밖에 없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한 것이며
신약인 새로운 약속을 따라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인 하나님께서 정한 연수까지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해야 가능하지만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지 못한 우리의 믿음 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므로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며, 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고 행복하게 잘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두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한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명령하고 또 강조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경의 외모인 이 세상을 위한 도덕천을 따라 모범이 되는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이 세상에 성공한 영웅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게 보여
진리의 달인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기 위하여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의 외모를 따른 사랑을 위하여 조건과 자격을 갖추려고 발악하다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여 구원에 실족하고 있음을 바로 알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복음을 가르치는 도구인 손가락으로 사용하여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를 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게 누리는 증인의 삶을 통하여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율법을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가인과 아벨(셋), 아브람과 롯,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비롯하여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의 잣대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바울은 딤후3장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함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구원 받은 것임을 알게 한다 라는 의미를 조금 부족하지만 잘 말해놓고
다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이 신기루인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도덕천을 따른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미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종교인 선배들과 아직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판단함으로 입으로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제사나 예배나 기도나 헌금을 비롯하여 착하고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여 강요하며
자신의 배와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구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복음의 예수는 우리 각자에게 살아있는 구원의 길로 도덕천을 따라 우리들이 길로 인식하고 있는 여러 모양의 고정된 공통의 길인 율법이나 규례처럼 죽어있는 길이 아니라
살아있는 각자의 길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처럼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언제나 바른 길이 될 뿐 아니라 외모로 보면 길이 없고 아닌 것 같지만 이성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다 길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리므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 살아있는 각자의 길로 가야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너와 나의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을 옮기지 않는 것이 됨을 바로 알 때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울처럼 서로에게 부모나 선생이 되는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인의 조건과 환경을 갖추려고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실족하여 죽자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경고를 따라 선생이 아니라 천국 증인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은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 뿐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받은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며 천국과 가장 비슷하게 누리는 것이 되므로 신나고 행복하여 날마다 감사하며 달려갈 수 있을 것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증거하며 또 그 동안 우리들의 미혹된 사실들을 깨워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창세기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던 원죄의 논리는 도덕천인 외모에 따라 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한 것으로 복음의 첫 단추부터 아주 잘못된 심각한 오류임을 고발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의 죽음은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외모처럼 원죄를 비롯하여 죄의 결과가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당연히 죽는 것을 도덕천의 잣대로 판단하여 죄로 죽는 것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뱀의 유혹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 이를 원죄로 미혹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피조물이 선악과를 먹고 그 지혜를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허락하신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선악과는 허락하시고 생명나무 실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피조물이란 그 자체가 온전한 영생의 생명나무 실과를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래도 먹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체가 드러나 죽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피조물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또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영생할 수 없다는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이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은혜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자유의지를 따라 피조물의 참 복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불가능의 도전을 멈추는 회개를 하기보다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녀를 낳기 시작하고 이 세상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그것이 복처럼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복의 제목들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강한 도전인 불의와 불법임을 바로 알 때
외모로 보이는 성경 기록이 스스로 모순 속에 빠져 있음이 오히려 당연할 뿐 아니라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구원의 길을 만들기 위하여 선과 악을 가로수로 사용하여 고정된 죽은 길을 만들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지만
야보고서 1장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에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복의 본질은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에 피조물의 착하고 선한 도덕적인 어떠한 행위도 절대로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하여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는 회개를 한 후 복음의 실체인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셋이 아들을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천으로 말하고 있는 나의 하나님인 이 세상의 유혹이고 우상임을 바로 알 때
아브람 자체가 복이나 복의 근원이 절대 아닐 뿐 아니라 허락한다는 복의 제목들을 비롯하여 결혼이나 자녀도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에 뜻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불의와 불법임에도 복으로 착각하여 갈망하기에 복인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공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요셉의 실체도 이 세상의 이치와 유익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명철하고 지혜로워 그렇게 된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에
그런 요셉이 한 일의 결과는 애굽의 번영과 애굽 신의 입지를 더욱더 탄탄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요셉 자신의 부모 형제를 430년의 노예생활로 이끈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으로 이 세상의 유혹일 뿐 아니라 주겠다고 하는 복의 내용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인 구원이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의 자랑으로 유혹이며
약속한 가나안 땅도 천국의 예표가 아니라 이 세상 성공의 예표로 외모가 너무 멋이고 대단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가나안에 입성한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이를 증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기록의 대부분은 결과를 두고 이 세상의 관점인 외모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모가 아닌 공의로 다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직접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됨을 바로 알 때
예수님께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는 경고 말씀을 감사하게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다르게 생각하라고 주창하고 실천함으로 이 세상의 변화에 대단한 역할을 한 스트브 잡스가 하나의 교주처럼 세상의 칭송을 받지만 그 결과는 우리들을 컴퓨터나 스마트 폰의 노예로 만든 것처럼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으로 구원하려고 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아브람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우리들을 복의 노예로, 율법으로 구원하려고 한 모세는 율법의 노예로, 복음으로 구원하려고 한 바울은 복음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과 복음의 무지로 그들에게 미혹된 크리스천 종교인 지도자들도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정의와 착함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히려 그것들의 노예로 만들었고
또 그들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영웅호걸들은 때를 잘 만나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잠시 성공한 것일 뿐이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구원을 소유하여 누린 승리한 증인이 아니기에
사도행정4장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실 뿐 아니라 로마서 3장10절에서도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인 복음에 무지하여 유혹인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신기루를 잡으려고 열심히 달려감으로 성공처럼 보이거나, 그러다 지쳐 그 유혹의 요구를 외면하려고 스스로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우울 속에 빠지거나
또는 포기하여 자살하거나 모두 다 신기루 같은 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보들의 행진으로 그 마지막은 언제나 영원한 멸망뿐임을 바로 알 때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 때
성경기자나 초대교회 사도를 비롯하여 과거의 틀이나 오류에서 벗어나 지금 바로 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살아있는 도움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행복한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은 우리들의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인하고 누릴 수 있음을 바로 알 때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이 되어 신기루 구원을 잡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신기루 신앙심을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고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다가 때가 지난 후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어리석음도 행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감사하기보다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사역을 분별하지 못한 복음의 무지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하여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정말 깊이 명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하심을 받음으로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의 실체인 율법 즉 도덕천의 판단에 따라 이 세상과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조건과 자격의 유혹에서 벗어난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의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서로를 구원받은 온전한 승리자로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혼자만 승리자가 되기 위한 오만과 착각으로 이미 지난 불확실한 상대방의 과거나 도덕천을 따른 외모인 유혹으로 판단하여 지적하는 무례함은 스스로 심판자기 되어 상대방을 실패자나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려는 불의와 불법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살아있는 생명의 길을 두고 사망의 음침한 죽은 길로 가는 것으로 결국 함께 실족하여 죽자는 것일 뿐 아니라 동일한 잣대로 자신을 돌아보면 유혹의 실체처럼 상대방보다 더 추악한 악취와 죄악에 빠진 자신의 민망하고 부끄러운 실체를 망각한 참으로 한심한 작태로
성령님의 가르침과 요구를 따라 서로를 하나님으로 믿고 서로 사랑하기로 한 약속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회개와 복음을 거부하는 것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구원에 실족하는 유일한 지름길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가 아닌 외모로 판단하면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복음의 본질처럼 착각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기 위하여 평안과 자유가 없는 불안한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구원에 전혀 의미 없는 종교인의 행위로 영원히 구원에 도달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 선배들과 목교세들의 주장으로 불의와 불법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할 때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으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아무리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여 구원을 이룰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도 없기에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아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증인의 삶이 바로 행복임을 비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요한복음16장에서 분명하게 우리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보여주신 그림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이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인자로 오신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을 보내주겠다고 하시며 그가 와서 당신을 믿지 않은 죄가 무엇인지 당신의 사역을 완성됨으로 이제 보지 못하는 의가 무엇인지 그로 인하여 이 세상 심판을 받았기에 세상을 책망하겠다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고 하시며
또 이를 위하여 설명할 것이 많지만 우리들의 한계로 인하여 말하지 못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그것도 스스로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인 하나님의 뜻만 말한다고 함으로 성령님 외에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온전하지 못함을 반증해 주시며
또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역으로 구원계획의 완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로 인하여 처음에는 우리들이 곡하고 애통하며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곧 우리의 근심이 기쁨이 될 뿐 아니라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그날에는 아무것도 질문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즉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였으나 복음이 완성된 그때부터 구하면 구원을 받게 되고 그렇게 받은 구원으로 인하여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성령님을 도움으로 해야 할 것이 병 고침을 비롯하여 신기루로 곧 사라질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당신을 믿지 않는 죄로 표현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라는 구약의 본질과
인자의 예수가 복음의 예수로 됨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완성된 복음이 바로 의이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과
하나님의 뜻인 구약과 신약이 모두 완성됨으로 신기루인 이 세상이 곧 사라질 심판을 알게 함으로 우리 각자는 빨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서로 사랑하는 천국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한 종교 행위로 인하여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신기루로 헛된 이 세상의 정의와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한 종교행위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착하고 선하게 보이므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처럼 미혹하는 불의와 불법으로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하는 이 땅의 모든 교회에는
살아있는 복음인 예수는 없고 대단한 크리스천 종교인으로 스스로 교주가 된 아브람과 모세와 바울과 베드로 비롯하여 대단한 신앙심의 수많은 크리스천 종교인들만 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몸인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크리스천 종교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가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인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
이를 위하여 꼭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율법이나 선지자나 십자가를 비롯하여 성전, 제사장,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희년 등과
가정이나 부부나 자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어떠한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나 여러 가지 법과 제도는 절대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아니라 종교인을 양성하는 하나의 종교행위로 신기루인 이 세상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 때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을 전부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만 사랑함을 이미 태초에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완성하시고 천국을 소유할 유일한 길인 복음을 주신 것으로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인을 종교인의로 왜곡 변질하는 기록인 된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말씀을 비롯하여 비슷한 기록의 문자를 외모로 판단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미혹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억지를 부리며 하나님을 빙자하여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함으로 자신들의 배와 욕망을 채우는 종교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너무나 심각한 불의와 불법일 뿐 아니라 절대 실현 불가능한 도전임을 바로 알 때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구원)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인 신약으로
이는 곧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도와 선교를 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어디에 있던지 현재 있는 위치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그것을 누리는 천국 증인이 되리라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이 복음의 무지로 인하여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받은 구원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며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날마다 확인하는 살아있는 길로 가는 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이며 사명으로 이를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실체는 언제나 지난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현재와 미래인 천국만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 항상 깨어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스스로 점검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과 사명을 따라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신기루인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자격과 조건에 미혹되어 시기하고 질투하다 시들어가는 꽃이 되는 자신의 발견 할 때는 빨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부인해야 극복할 수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경고처럼 도덕천에 따른 종교인이 되어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울리는 신기루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된 나와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을 말하며
또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는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임을 바로 알고
그렇게 서로 사랑을 하면 요한복음14장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는 나에게 완성되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내가 나에게 당당하게 선포함으로
구원받아 예수님의 몸이 된 새로운 피조물임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신비를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자유를 누리 수 있게 됨으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현실이 되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기보다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직접 누리므로 구원을 확인하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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