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금까지 한 요한복음의 묵상을 정리해보면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를 좀더 요약하여 고상하고 고급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복음을 이해하기 쉽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혼미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몽학 선생의 실체임을 바로 인식한 후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아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천국의 증인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는 것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는 여호와 하나님임을 설명하기 위한 몽학 선생으로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오히려 표적이 될 수 있으니 벗고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이 바로 창세기 에덴 동산의 선악과 사건과 퇴출 이후 자유의지에 따른 불가능의 도전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을 비롯한 구약의 선지들을 말하는데 문제는 증언의 목적이 구약의 선지자는 빛이지만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라 복음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빛을 증언하므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는 기록과는 반대로 사람들을 그를 복음이 아닌 빛으로 그를 영접하려고 몽학 선생을 따라 많은 표적을 구하였으며
또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을 받아야 함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므로 지금까지 복음을 가르치는 몽학 선생인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자녀를 붙잡고 있으므로 오히려 복음을 가로 막고 있을 뿐 아니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기록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 주권이 있는 것처럼 미혹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몽학 선생인 베드로의 고백에 멈춰 있으므로 오히려 이 고백이 표적인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함으로 세례 요한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한계를 선과 후로 착각하여 자신과 동일시 할 뿐 아니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기보다 모세를 통하여 온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하여 회개를 하게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복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예수를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으로 대체로 잘 기록해 놓고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다른 점임을 복음의 무지로 오히려 애매하게 설명하자
이에 유대인들이 바로 알기 위하여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애매하게 회피하다 코너에 몰리자 결국 묵시인 구약을 실제인 것처럼 미혹하여 자신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하자
오히려 더 혼미하여 뜬구름을 잡기 위하여 다시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고 하자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다시 애매한 동문서답을 말하는 것은
결국 세례 요한 자신부터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정답으로 말한 구약의 묵시인 무엇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고 하므로 자신의 역할인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예수께 세례를 주는 것임에도 그를 증언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할 뿐 아니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고 복음의 무지로 자신의 착각을 진짜처럼 말하여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으며
복음과 별로 상관없는 제자로 착각하고 있는 증인을 택하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면서 복음이 아니라 구약에서 묵시로 보여준 그림들을 빙자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말하므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갈릴리 가나에 있는 어떤 혼인 잔칫집에 어머님과 함께 초대를 받은 예수님이 잔칫집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두고 아래의 기적을 위하여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자 이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바르게 잘 말해놓고
어떤 목적을 위하여 바로 예수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고 그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참으로 어색한 말을 하고는 물로 먹고 있는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변화된 것을 보여주면서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기록함으로 예수의 어머니를 특별한 여자 성모 마리아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표적을 구하므로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몽학 선생인 표적의 옷을 벗지 못하고 있지만
그 그림이 실체는 비유이든지 사실이든지 상관없이 천국과 우리의 구원은 물이 좋은 포도주로 변화는 것처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임을 보여주거나 설명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고 하는 것은 그런 예수를 목수 아들의 예수로 표적을 구하여 이해하려고 하다 안되니 미쳤다고 하기 때문에 당연히 당신의 길을 가신 것이며
성전 정화로 말하고 있는 그림은 복음서마다 공통으로 구약까지 빙자하여 예수를 도덕천을 따른 대단한 종교인으로 높이기 위하여 스스로 종교의 표적을 구하지만 결국 종교의 실체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것임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으며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하는 것은 보여주는 성전 정화의 그림만이 아니라 예수의 지나온 행적에 대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검정을 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참담한 말이기에 삼일 만의 부활을 말한 것으로 미혹하여 그들이 구하는 표적을 따라 종교를 위하여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당신의 사역이 종착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으로 처음 선포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따라 회개와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하는 것처럼 택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람이 많이 그리스도 예수로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을 피하여 당신의 길을 갔다는 것으로 결국 예수와 택한 그들의 생각과 뜻이 다름을 알 수 있고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려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의 고백을 그렇게 반기는 모습을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록들은 참으로 의미 없고 허황된 것으로 서로 모순이 됨을 바로 알 때
택한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최고의 종교인 교주가 되길 바라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이 말하고 있는 복음과 천국의 증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몽학 선생의 표적을 구하기보다 몽학 선생의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임에도 오히려 더 입으려고 발악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는 그림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마19장의 어떤 부자 청년의 질문이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한 말은 그 부자청년에게 영생은 계명에 섬김을 더하여 결국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마태의 그림을 거듭남의 그림으로 바꾸어 좀더 복음에 가깝게 설명하는 것 같지만 회개를 물과 성령으로 미혹하고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을 육과 영으로 미혹함으로 오히려 혼미할 수 있으며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는 긴 말은 표적을 구하지 말라는 것임에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예수님을 빙자하여 구약으로 오히려 표적을 구하게 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창세기를 통하여 보여준 것처럼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을 독생자보다 사랑하는 것처럼 미혹하여 정말 독생자가 있는 것처럼 독생자의 표적을 만들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심판, 정죄, 빛, 행위 등으로 복음을 좀더 잘 설명하는 것 같지만 비슷할 뿐 정답이 아니므로
결국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의 과정을 설명하여 오히려 더 혼미하게 하는 것 같은 이것이 바로 몽학 선생의 실체임으로 바로 알 때 몽학 선생을 따라 표적을 구하기보다 졸업을 하듯이 몽학 선생의 옷을 하나씩 벗어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온전한 복인 구원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세례 요한이 각각 자신들의 자리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그림은 요한이 자신의 본문을 넘어 회개하기보다 자신의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그러자 모든 것이 예수 쪽으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음을 각인시키는 요한 자신의 제자 말에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고 세례 요한 자신의 사명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여 설명한 후
그래서 자신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스스로 충성된 종임을 강조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멋있게 선언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론일 뿐 실체는 회개하지 않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위하여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종교가 됨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과 신랑의 친구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신랑으로 인한 친구의 기쁨은 절대로 충만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되지 못하면 종교인으로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멋있고 대단한 명분으로 표적을 구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가 쇠하더라도 내가 흥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표적을 구하는 종교인의 모습이고 피조물의 한계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즉 그리스도가 되는 복음을 주신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하늘과 땅을 분별하여 그리스도를 마음껏 높이고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고 교묘하게 세례 요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무지함을 지적한 후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고 자신의 말을 듣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교묘하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이를 확증하듯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우리들은 영원히 아버지 대신한 그 아들과 주종관계를 이루어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순종과 불순종의 잣대로 우리들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으로 미혹하여 결국 그 표적을 구하는 종교를 만들어 지금까지 몽학 선생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사마리아 여인의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외모로 판단하여 표적을 구하는 종교를 위하여 대단히 유명한 것이지만 우리는 먼저 이 그림이 말하는 주인공은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라 증인으로 바로 세우기 위하여 택한 그들임을 먼저 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의 무지로 예수를 포함한 택한 그들이 세례를 베풀어 요한보다 많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것임에도 종교 수단을 위하여 기록하여 지금까지 세례를 베푸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바로 알고 이어진 그림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당신의 길을 가기 위하여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위기를 잡으므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이 가리고 있는데 그것은 이어진 그림의 메시지 대상을 택한 그들에서 복음과 의미 없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미혹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하시는 것처럼 제자란 그들을 그렇게 택한 것임을 말하고 있음에도 복음의 무지로 오히려 기자는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고 대상인 주인공을 배제하는 우를 범하여 도구인 사마리아 여인을 주인공으로 미혹하고 있으며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하는 것처럼 택한 그들이 표적을 구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아리송한 말의 의미는
너희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의 실체가 도덕천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구원과 천국임을 바로 알았으면 물을 달라는 나의 부탁처럼 택한 너희들이 표적을 구하기보다 자신을 바로 알고 살기 위하여 나에게 매달렸을 것이고 그랬으면 생수인 구원을 소유했을 것이라고 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라고 하는 것처럼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함으로 바로 당신을 신성모독 죄로 몰고 간 것이라고 하시며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것처럼 빨리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아 되면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처럼 스스로 온전함을 말함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처럼 택한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이에 바요나 시몬아 하는 것처럼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며 기뻐함도 잠시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하는 것처럼 끝없이 이 세상을 따라 복음보다 표적을 구하자
실망을 뒤로하고 다시 증인으로 바로 세우는 훈련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면서 이 세상이 헛되고 헛된 신기루임과 구원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비유와 기적으로 설명하자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대단한 선지자나 하나님의 아들로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고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표적을 구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는 것처럼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고 구약의 표적을 따라 복음의 무지로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복음을 죽은 종교의 틀에 가두려고 발악하며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하는 것처럼 입으로는 복음을 구하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바로 복음을 가장 온전하게 가르치는 최고의 몽학 선생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표현하면서 복음의 실체를 보여 줌에도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는 것처럼 택한 그들이 바로 깨닫거나 알기 위하여 질문하기보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구하는 표적을 따라 복음의 본질보다 몽학 선생인 하나님의 아들을 표적으로 구하므로 종교가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는 것이나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택한 그들의 시각차이의 실체이고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다시 증인으로 바로 세우기 위하여 율법과 복음을 설명하지만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하는 것처럼 복음의 본질은 외면하고 외모인 기적과 이적에 미혹되어 택한 그들이 아직도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고 있다는 그림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란 것은 연결된 그림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두고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짜집기 한 것이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까지 더하여 예수님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기록하고 택한 그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표적을 구하므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증인이 되기보다 종교인이 되려고 발악함으로 복음을 가라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많은 병자들의 그림도 예수님의 일상의 한 면을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대단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부각시키려고 기록하고 있지만 기자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는 이것으로 예수님 사역의 본질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과는 달리 예수님은 병자 모두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입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굳이 안식일 날 실행을 하여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고 하는 것처럼
유대인들 율법을 따라 구하고 있는 표적의 하나인 안식일을 손상시키므로 먼저 시비를 초청해 놓고는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는 그림처럼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신성모독의 죄에서 비겁하게 살며시 몸을 숨긴 후 다시 또 드러냄으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고 하는 것처럼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 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하는 것처럼 오히려 더 분명하고 선명하게 신성모독의 발언을 하며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나님께서 공적으로는 당신이 안식하니 모두 안식하라고 안식일을 선포해 놓고 사실은 몰래 숨어서 일을 했다는 위선자 아버지에 그 아들처럼 말하면서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는 것처럼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 그 아들을 우리 피조물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참으로 웃기는 주장을 하며
그것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복음의 무지에 따른 엉터리 주장과 논리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복음과 상관없는 믿음과 영생을 선포하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복음과 상관없는 복음을 선포하며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고 복음과 상관없는 심판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복음의 상관없는 율법인 도덕천을 따른 부활을 선포하며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하나님의 공의를 빙자하여 몽학 선생이 된 가짜 복음의 선포를 진짜로 미혹하기 위한 명분을 삼으며
또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고 세례 요한이 율법인 도덕천을 따른 회개의 선포를 예수님의 회개 선포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과 달리 복음과 택한 그들의 증인 훈련을 위하여 그냥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며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다른 점을 부각하며 결과적으로 대단한 복음의 몽학 선생이 된 후 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는 그림이 바로 외모를 따라 표적을 구하는 종교의 실상임을 바로 알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들이 해야 할 행동은 율법인 도덕천을 따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불가능의 도전처럼 착하고 선행 행동과 행위가 아니라 바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그림도 예수님께서 택한 그들에게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각자에게 있어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너무나 멋있고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고 기록된 진짜 의미는 사람들이 아니라 택한 그들이 바로 깨닫기보다 표적을 구하자 다시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신 것이며
바다 위로 걸어 오는 그림이나 무리들이 어렵게 찾아오는 그림은 그들이 구하는 표적을 위하여 예수님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능력을 부각시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한 것임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과 전혀 무관한 엉뚱하고 이상한 말로 미혹한 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빙자하여 사실처럼 말하자
이에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복음의 몽학 선생으로 표적인 인자로 오신 예수를 정답이라고 하자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당연히 구약인 이세상의 방법으로 표적을 구하자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복음과 전혀 무관한 궁색한 변명 같은 말에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표적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복음의 몽학 선생을 복음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복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아니할 생명의 떡이나 생수를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떡과 물이 필요 없는 온전함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보여주시는 그림처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도덕천의 잣대로 죄인으로 만들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의 예정론과 선하심을 부각하여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공의를 선포하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고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왜곡 변질하여 선과 악으로 분별하여 결국 심판을 선포하는 복음의 몽학 선생을 복음으로 미혹하여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는 것처럼 오히려 사람들로 의구심을 갖게 하고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고
하나님과 구약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동원하여 공갈 협박과 애걸 복걸로 제발 믿어주길 바라는 나약한 모습을 오히려 사랑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는 것처럼 오히려 이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기 위하여 당연한 의구심의 표적을 구하자
다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비굴하게 보일 만큼 공갈 협박과 애걸 복걸하는 것을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고 사랑의 훈계처럼 미혹하자 이번에는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택한 그들이 표적을 구하자
이에 대하여 또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고 역시 공갈 협박에 애걸 복걸을 하자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전혀 다른 각도로 예수님의 일상을 미혹한 후 너희들은 나를 누구로 생각 하느냐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중간 점검을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그래도 택한 그들을 초대교회 제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무리들과는 다름을 부각시키며
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지금도 교인이 자살하면 명분이 없어 설명이 곤란한 것처럼 자살한 가룟 유다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귀로 표적을 구하는 등 악을 발하고 있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으로 택한 그들을 천국 증인으로 세우는 것임을 모르고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온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예수와 택한 그들과 무리들을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판단한 즉 외모로 판단한 그림을 보여준 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복음과 증인에 대하여 말하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고 하는 의미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증인으로 바로 서지 못했다는 표현이고, 또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천국과 구원을 그들이 구하고 있는 이 세상의 표적으로 나를 알려고 한다는 것이고,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한다는 것은 회개 않고 오히려 표적으로 그렇게 도전하는 것이 바로 불가능임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보여주시는 여러 가지 그림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인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보다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님의 일상에 구약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의미를 부여함으로 도덕천을 따른 대단한 종교인을 세우기 위하여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진짜 의미는 예수님께서 택한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천국과 구원을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으로 이해하려고 보여주신 그림처럼 공의로운 판단인 도덕천의 표적을 따라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발악하기보다 회개하라는 하라는 것으로 바로 알 때
보여주신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예수님 사역의 실체를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으로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함에도 이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답을 찾으려고
택한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사역인 일상을 외모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동원하고 빙자하여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온 인류의 최고의 종교인 선생인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하여 보여주는 많은 그림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는 그림처럼 복음이나 증인과는 전혀 무관하고 실체가 없는 그림으로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표적을 따라 가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따라 그냥 그렇게 가신 것을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만 이를 우리는 복음의 몽학 선생으로 잘 받아야 하고
간음한 여인을 정해진 율법대로 집행하지 않고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하여 시험한 것이 율법에 올인 한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성경기자가 솔로몬을 능가하는 대단한 종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만들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시며 고민하는 모습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도덕천을 따른 잣대를 사용하여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는 그림은 대단한 선생인 솔로몬의 모습으로는 좋지만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으로 증인인 예수님의 모습으로는 어색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는 그림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피조물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비롯하여 도덕천을 따른 솔로몬의 모습으로는 좋지만 복음을 따른 예수님의 모습으로는 참으로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멋있게 마무리 함으로 결국 예수를 세상의 빛인 최고의 종교인 교주로 세워 이를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미혹하고 있지만 생명의 빛은 회개하고 복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요한이 생각하는 요한 복음을 진짜 복음으로 미혹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고 이를 복음의 몽학 선생으로 사용할 때 진짜 복음을 직접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보여주신 그림처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림도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자유 한다는 말을 당신을 교주로 섬기면 이란 말로 미혹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그림처럼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도덕천의 잣대로 자유가 아닌 신분의 변화를 자유로 미혹하고 있지만 주인이고 종이고 어느 누가 감히 피조물의 한계인 죽음에 대하여 자유하며 영생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이 세상의 논리로 복음을 설명하려고 복음의 과정인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시는 그림들은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으로 결국 구원을 위하여 회개하기보다 각자 자신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발악하는 것으로 이것이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되어 지금까지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발악하므로 오히려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그저 복음의 몽학 선생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그림은
가는 길에서 만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준 예수님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는 말의 본질은 당신이 오신 목적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이고 그 복음이 완성되면 그 동안 구하고 있는 표적인 몽학 선생의 옷을 다 벗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최고의 종교인의 자리에 올리는 말을 첨가하여 미혹하고 이의 명분을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예수님의 일상에 신비를 첨가하고
그 신비가 진짜임의 명분을 세우며 굳이 안식일 날 사건을 만든 것은 율법이 표적임을 말하는 것임에도 이를 왜곡 변질하여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가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만들고
또 그들이 원하는 답을 만들기 위하여 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는 논쟁 속에서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고 사실처럼 보이는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을 동원함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처럼 미혹되어 표적이 됨을 모르고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표적으로 답을 찾기 위하여 발악하며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함으로 결국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이단이니 하면서 기득권 싸움을 하는 지금의 종교인들처럼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을 미혹하기 위하여 예수를 빙자하고
또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도덕천을 사용하여 죄와 심판을 선포함으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표적이고 몽학 선생으로 그 동안 입고 있던 이 몽학 선생의 옷을 하나씩 벗어가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증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몽학 선생인 예수를 문으로 착각하여 표적을 구하므로 결국 예수를 최고의 정통 종교인 교주로 만드는 것이며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는 그림도 회개하라는 것을 오히려 표적인 예수를 따르는 종교인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것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는 것을 비롯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는 그림은 예수와 십자가 사건을 빙자하여 종교를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자신들의 생각을 합리화한 것일 뿐 아니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며
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전도와 선교에 순교의 명분까지 세우고 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답이 없는 논쟁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며 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예수께 당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란 말에 이미 했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시 설명하는 내용은 유대인이 보기에는 신성모독이고 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함에도 왜 돌로 치려고 하여 신성모독을 하느냐고 하자 이에 유대인들이 그것은 선한 일을 빙자하여 신성모독을 하기에 치려고 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일부를 빙자하여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하며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이미 알고 있는 결과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답처럼 더 강력하게 펼치자
예수를 골수 이단으로 판단한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난 것을 기록하여 그들을 폭군으로 자신들은 선하고 참이고 강자임에도 약자처럼 한걸음 뒤로 물러서 주는 것으로 미혹한 후
다시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 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기록함으로 결국 종교를 위하여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이 세상의 방법인 외모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답처럼 교묘하게 미혹하므로
오히려 복음의 몽학 선생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이 몽학 선생인 표적의 옷을 하나씩 벗으므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가 더욱더 온전해져 행복한 증인의 삶을 누릴 수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 남매의 그림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것처럼 복음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했다고 하면서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결국 나사로가 죽은 후 갔다는 어색한 그림을 연출한 것은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결과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함이고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는 것도 이틀이나 지체 해놓고 갑자기 생명의 위험까지 불사하는 모습의 연출도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이며
또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부러 죽음을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을 희석하기 위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교묘하게 다른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면서
예수 앞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것을 비롯하여 펼쳐지는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마르다의 어색한 고백으로 복음을 부활로 미혹한 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므로
복음의 몽학 선생인 예수 스스로 복음이 부활이고 그것이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외모로 판단한 복음을 진짜처럼 착각한 주장을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고 다시 베드로의 고백까지 빙자하고
예수의 눈물과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기 위하여 자화자찬의 쇼까지 동원하여 최고로 극적인 결과인 죽은 지 나흘 되어 악취가 나는 나사로의 부활을 완성하자 이를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다고 하여 결국 자신들의 주장이 진짜임으로 미혹하며
또 한편으로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면서 기득권 종교인 세력을 한계와 그 실상을 확대하고 왜곡 변질하여 비하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고 십자가 사건을 기득권 종교인 스스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미혹하고
또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기록하여 기득권 세력을 무지한 죄인으로 만들므로 자신들의 주장이 진짜임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지만 이미 묵상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는 당신의 사역인 복음을 위하여 당신을 길을 가신 것을 기득권 세력을 피하여 숨어 다닌 것으로 미혹하여 기득권 세력의 무지와 불법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복음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두에게 증거하고 부활을 보여주기 위한 순교의 쇼가 됨에도 이를 자신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합리화하려고
십자가 사건이 기득권 세력인 종교인들의 무지로 일어난 것으로 미혹하여 이를 믿고 따르는 새로운 개혁 종교인 기독교가 일어났지만 지금까지 개혁에 또 개혁을 부르짖으며 무늬만 비슷한 다양한 모양의 종교가 수없이 계속 일어나 복음의 몽학 선생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하듯이 가지고 있던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다 부은 한 여인의 그림을 이용하여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왜곡하여 도둑으로 미혹함으로 예수를 판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는 생각은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도덕천인 몽학 선생을 따라 표적을 구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생각으로 바로 알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는 그림이 바로 도덕천인 종교를 위하여 표적을 구하기기보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고
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는 그림이 바로 표적을 구하고 있는 우리들의 실상으로
예수보다 부활한 나사로요 회개를 하기보다 자신들의 잔에 찬 이세상의 것으로 표적으로 구하는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처럼 복음을 가로막는 것이기에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그림도 결국 그들이 구하는 종교를 위하여 구하는 표적을 따라 자신들의 명분을 위하여 구약과 일치 시키기 위한 것으로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고 하는 것처럼 실제 사건이든지 조작되어 기록된 것이든지 복음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 지라”는 기록과 함께 보여주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사로의 부활을 이용하여 기존의 기득권 종교인으로부터도 인정 받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고
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빙자하여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그들이 구하고 있는 도덕천의 표적을 따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면서 사랑의 희생과 순교와 섬김을 그로 인한 상급을 미끼로 강요하지만 그것은 복음의 몽학 선생일 뿐 복음의 본질이 아님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온전하여 누구의 사랑이나 희생이나 순교나 섬김이 전혀 필요 없는 온전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서 보여주시는 그림도 잠시 이 세상의 표적을 구한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이 구하는 종교를 위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 미혹하는 것이며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는 그림도 이미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을 자신들이 구하는 종교를 위하여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고 스스로 질문을 하고 이에 자신들의 모습을 두고 이를 정답처럼 미혹하기 위하여
복음을 외모로 보고 묵시로 기록한 이사야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복음의 무지로 자신들이 하는 짓도 역시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을 비겁한 위선자로 비하시키면서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예수를 빙자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최고의 종교인 교주로 세우며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빙자하여 사랑의 이름으로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대단한 종교인 교주로 세우므로 오히려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이 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그림도 복음의 무지로 십자가 사건을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온전하고 전능하신 속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웃기는 모습으로 결국 자신들이 구하는 표적의 명분을 위해 기록한 것이고
또 우리들이 이미 묵상한 것처럼 증인의 삶을 위하여 서로 사랑함의 모본으로 보여주신 세족의 모습을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구하는 표적으로 설명이 곤란한 가룟 유다의 행위를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는 것이 증인의 삶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이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약까지 동원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드러내려고 할뿐 아니라
자신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참으로 해석이 곤란한 가룟 유다의 행위로 십자가 사건이 완성된 것처럼 예수까지 동원한 황당하고 웃기는 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와 불법으로 복음을 가리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예수의 행동에 신비의 의미를 부여하여 정답이 없는 종교를 만들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하여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구제를 통하여 사람들로부터 제자로 인정받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도덕천인 몽학 선생을 따라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복음을 가로막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서로 사랑을 하기보다 표적을 구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는 그림이 바로 도덕천인 몽학 선생을 따라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종교와 이 세상인 우리 피조물의 실상임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그림은 이제는 도덕천인 율법의 몽학 선생을 따라 표적을 구하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이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는 그림도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을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따라 종교를 위하여 이렇게 표현하여 기록한 것으로 바로 알 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는 말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그렇게 많이 보여준 것처럼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임으로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라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기보다 오히려 표적을 구하자
그런 그들을 위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스스로 최고의 선생이 되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증인의 삶을 살아 천국을 소유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표적으로 구하므로 종교가 된 것으로 바로 알 때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는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그가 바로 우리 피조물로서는 절대로 알 수도 온전하게 표현할 수도 없기에 우리는 그냥 복음이라 명명하여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무엇을 말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 수 있으며
이에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하는 그림은 회개하지 않고 표적을 구하고 있는 그들의 당연한 모습으로 이에 예수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는 그림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표적을 구하고 택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당연한 예수의 반응으로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당신의 사명을 위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그들을 복음과 천국의 증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애를 쓰다가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는 그림처럼
결국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으로 오신 예수가 스스로 최고의 선생의 자리인 하나님의 아들로 올라가 표적을 구하는 선생이 된 모습으로 이것이 바로 땀 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는 그 유명한 기도 모습의 전반부인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즉 내가 해결하고 싶다는 표적을 구하는 모습이고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그림이 바로 기도의 후반부인 하나님 원대로 하라는 회개의 모습으로 바로 알아야 예수가 바로 복음과 증인을 위한 최고의 몽학 선생으로 회개와 증인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보여주신 그림 속에 분명하게 있으면서도 또 분명하게 보이거나 잡히지 않는 진짜 참인 그 무엇과 몽학 선생인 예수를 동급처럼 표현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예수가 참이고 진짜처럼 아리송하게 미혹하자
표적을 구하고 있는 택한 그들은 당연히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이에 예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 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 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복음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하여 애매하게 표현함으로 결국 복음을 도덕천인 몽학 선생을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해 구하는 표적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수는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이기에 십자가 사건으로 당신의 임무가 종료됨을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표현하여 기록할 뿐 아니라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는 그림처럼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을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위하여 최고 종교인 선생인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것으로
예수가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은 즉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참 포도나무 임에도 복음의 몽학 선생인 예수를 참 포도나무처럼 말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표적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바로 알 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는 그림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는 그림도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것으로 이는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인 예수의 지나친 열정으로 스스로 참 포도나무로 착각한 것일 뿐 아니라 구원과 천국인 영생을 많은 열매와 외모인 실적으로 미혹하여 표적으로 구하게 함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심판으로 위협하며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상급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달콤한 표적으로 유혹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는 바른 의미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여 십자가 사건을 최고의 사랑으로 찬양하며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표적으로 구하고 있는 순교나 사랑이나 섬김이나 봉사나 나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며 살아있는 길로 가는 증인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도덕천의 자리에 올리므로
그 예수가 우리들을 택하여 불러주고 의롭게 하여 성화가 되고 영화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 종교인으로는 그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게 밀려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도덕천인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고 발악하고 있지만
그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로 스스로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인 참 포도나무가 되는 복을 버리고 몽학 선생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종과 죄인으로 허공 속을 헤매는 불가능의 도전으로 발악하다 실족하는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말과는 달리 사랑의 나팔을 불고 꽹과리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지만 오히려 복음인 천국을 가로막고 자신은 물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복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종교 행위를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또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하라는 말을 왜곡 변질하여 당신의 사명을 따라 당연히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스스로 자초한 것임에도 오히려 사람들의 죄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원하는 종교의 명분으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을 비롯하여 구약 등 모든 것을 사용하여 발악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는 말이 바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하여 왜곡 변질된 것으로
그 실체는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어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그 무엇인 보혜사 또는 진리의 성령 또는 우리가 복음이라 명명한 그 무엇을 소유하면 의미 없는 몽학 선생인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하게 하고 그러므로 복음으로 복음인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구원을 받아 이 세상이줄 수 없는 평안으로 자유를 누리는 증인의 삶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한다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는 그림도 율법인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는 종교인으로 예수를 바라본 당연한 모습이고
예수가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역시 복음의 무지로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종교인들의 당연한 모습으로 결국은 복음을 복음으로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받기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표적으로 구하기 때문에 일어난 모습으로 바로 알 때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는 그림이 바로 예수를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최고의 종교인 교주인 도덕천으로 착각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그들은 예수가 영원히 함께 있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있으면 될 것임에도 굳이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라고 하지만 이는 곧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택한 그들로서는 그들의 표적이 살아지니 당연히 떠나가길 즉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는 말처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표현한 것으로 표적을 구하는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한 말이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필요한 것은 보혜사가 아니라 그들의 표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기 때문인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14/2에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간다는 헛소리로 미혹하므로 지금도 그 예수를 구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예수교임을 바로 알아야 하며
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는 그림은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인 예수가 가르치는 그 무엇으로 도무지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어 우리가 복음으로 명명한 그 복음이 오면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하여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이고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그림은 예수 스스로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에서 진짜인 그 멋진 그 무엇이 되고 싶어 땀 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도록 표적으로 구하는 것을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는 그림은 예수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인 자신의 본분으로 바로 돌아간 것을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이렇게 표현하여 기록한 것임에도
이를 진짜로 미혹하기 위하여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고 하므로 예수를 몽학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최고의 종교인 교주로 세우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미 일어난 결과를 가지고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며 또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으로 복음인 된 새로운 피조물을 부활로 착각하여 미혹할 뿐 아니라
이것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고 서로 북치고 장구치는 쇼를 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십자가의 사건을 부각시키며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부활을 승리처럼 확증하여 미혹하고 있지만
복음은 예수 안에서 누리는 불안한 평안이 부활이 아니라 스스로 온전하기에 누리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로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인 천국에 입성한 것이기에 결국 이 세상의 어떠한 조건이나 자격이 전혀 의미 없고 그저 서로 사랑함으로 그 복을 확인하고 누리며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는 그림은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하기 위하여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그들의 기도를 예수를 빙자하여 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의 실체이고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는 그림은
예수가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의 사명을 완성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면서 이어진 긴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복음으로 착각하고 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기도문 같지만 사실은 신기루 같은 헛된 기도문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파는 가룟 유다와 특별한 예수의 체포장면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하므로 배신하는 그림 등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심문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고
증인과 복음의 몽학 선생인 예수의 삶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진짜 복음으로 착각하여 대제사장을 무시하는 답변에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주의를 주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하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결과인 부활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구하는 표적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불의와 불법임을 알지 못하고
계속하여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황당한 물음에 예수가 행악자란 답변은 대제상이 심문한 죄목인 신성 모독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어색하고 이상한 쇼를 할 뿐 아니라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고 심문중임에도 대단한 선견지망이 있는 것처럼 사형으로 확정하여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고 스스로 한 어색한 쇼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황당한 말과
또 이번에는 빌라도 스스로 고소장을 무시한 황당한 질문에 행악자란 답을 들은 것을 무시하고 고소장대로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을 하자 이에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는 예수의 답변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는 참으로 웃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것이나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계속하여 참으로 어색한 쇼를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유대인의 왕임을 주장하는 억지이고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고 그 답으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몽학 선생인 예수의 옷을 벗지 못하므로 우리가 복음으로 명명한 바로 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그 진리로 착각하여 미혹함으로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의 교주가 되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인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일 뿐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는 그림이나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는 그림이나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 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는 그림이나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는 그림이나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는 그림이나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는 그림이나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는 그림 등을 통하여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었다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신성 모독을 하기에 당연히 죽여야 하는 것이지만 빌라도 입장에서는 신성 모독은 죄가 아니기에 유대인의 왕이란 반역죄를 만드는 쇼를 하는 것으로
이는 결국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위하여 표적인 예수는 죄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유대인과 빌라도의 무지로 죽은 것으로 만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이 바로 온전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폄훼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예수는 복음과 증인의 온전한 몽학 선생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걸어간 것으로 바로 알 때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는 그림은 각자 자신들의 명분을 위하여 빌라도는 당연히 죄목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요구하는 것도 당연하고 또 칼자루를 진 빌라도가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는 것도 당연함에도 이를 죄 없는 예수를 인정하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형 집행 현장에서 제비 뽑아 옷을 나누는 그림까지 성경을 빙자하여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부각시키는 것이고 또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는 그림은
그 동안 복음이 아니고는 절대로 해석이 곤란했던 가족을 향한 예수의 불편한 진실인 마10/34~39, 12/46~50, 막3/31~35, 눅8/19~21, 12/51~53, 14/26~27, 말씀을 재해석하는 명분을 줄뿐 아니라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도덕천을 따라 효자 예수로 미혹하는 것이고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는 그림도 통상이 형 집행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굳이 다 이루었다고 기록하는 것이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으로는 오히려 어색함을 알아야 하고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는 통상의 그림을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의미를 부여하여 기록하는 것이나
장례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여 기록하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과 전혀 무관한 것을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의 표적인 예수를 죄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미혹하기 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여주는 많은 그림들은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고,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고 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그 무엇인 복음이 아니라 그들의 표적인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또 부활하신 예수는 인자로 오신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기에 마리아를 비롯하여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 등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하는 그림이나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는 그림은 그들의 구하는 표적인 인자로 오신 예수를 부활의 예수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여 종교를 만드는 것이며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종교의 명분을 확증하는 것이며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는 그림은 욥을 사용하여 고난에 재갈을 물린 것처럼 도마를 사용하여 믿음의 의구심에 재갈을 물린 것으로
결국 이렇게 한 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그림처럼
복음이 아니라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예수를 교주로 하는 종교인 예수교를 위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참임을 확증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로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인 예수를 바로 깨닫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좋은 명분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는 그림도 인자로 오신 예수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예수를 분별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는 그림이나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는 그림이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예수가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으로 스스로는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외모로 판단하여 부활하신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질문하고 이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하자 이에 예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는 것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베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수제자 그리고 초대 교황의 명분을 주는 것이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라는 그림은 베드로의 죽음을 보고 이렇게 기록함으로 위의 명분을 예수의 뜻처럼 확증시키는 것이고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는 그림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 스스로 베드로 다음으로 예수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표현하는 이면에는 베드로의 눈으로 요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기록함으로 베드로와 예수의 총애 싸움에 스스로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은 각자의 복음이기에 예수도 우리들에게는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일 뿐 참이 될 수 없기에 그렇게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임에도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최고의 선생이 되려고 욥의 세 친구들처럼 경쟁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불편한 진실을 빙자하여 베드로를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베드로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요한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는 그림처럼 베드로는 책임감을 가지고 대표로 순교하겠다는 용기를 보이지만 이것을 전에 예수로부터 사탄아 뒤로 물러서라는 것을 비롯하여 질책을 받은 것처럼 무지하다는 평가를 예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며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기록함으로 외모는 베드로가 최고처럼 평가 받고 있지만 그 중심은 베드로보다 요한 자신이 더 온전하게 예수의 총애를 받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요한 복음으로 요한 복음의 옷을 벗고, 복음과 증인의 최고의 몽학 선생인 예수로 예수의 옷을 벗어, 몽학 선생을 표적으로 구하는 성령훼방을 하기보다 내가 바로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하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소망인 참이고 진리인 영생과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위하여 철학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하였고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사라질 신기루인 헛되고 헛된 허상일 뿐 아니라 영생과 천국은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피조물 스스로는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라고 하시며
그러나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기 보다 보여주시는 예수를 비롯하여 모든 도구인 몽학 선생을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함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잔을 비우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빈 잔에 영생과 천국을 알 수 있는 성령을 채워줄 뿐 아니라
영생의 실체인 진리와 생명이 되는 복음으로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복음이 되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채운 너무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랑스런 자신의 잔이나 반대로 부끄럽고 비참한 자신의 잔이나 어떤 모양이고 조건이든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피조물의 잔은 신기루인 헛된 것으로 그것으로는 절대로 영생을 소유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깨닫도록 주신 지혜인 선악과 즉 몽학 선생으로 바로 깨달아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잔을 가득 채우는 표적으로 삼아 정답을 찾기 위하여 그 자체를 원죄라고 정의하고 에덴 동산에서 퇴출된 후 스스로 영생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대신에 도덕천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몽학 선생으로 표적을 구하므로 그것이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며 복음을 가리고 있기에 표적을 구하는 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표적이란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잔을 채우려고 하는 모든 것으로 우상이나 음란이나 악한 것을 비롯하여 갈5장의 성령의 열매나,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요일2장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것이 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한편으로 몽학 선생이 되어 복음으로 가르치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양면성이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란 자신의 잔을 채우는 표적으로 도덕천을 구하는 것으로 그 외모는 참으로 멋이고 대단하여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야 하는 올바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신기루인 헛된 길임을 온 성경을 비롯하여 베드로의 통곡이나 가룟 유다의 자살 등으로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구약은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생을 얻는 길을 주겠다는 것임에도 이를 바로 깨닫기보다 피조물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라 자신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몽학 선생으로 표적을 구하며 발악함으로 오히려 스스로 그 사실을 반증하게 되었고
회개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움이 절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잔을 완전히 비우므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도덕천을 따라 잘못된 것만 비우는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이란 회개함으로 자신의 잔을 완전히 비우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님으로도 표현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그 빈 잔을 가득 채우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겠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피조물의 잔을 가득 채우신 그 무엇인 성령님께서 피조물 스스로 진리와 생명인 영생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게 함으로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 이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선물로 받는다
신약이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누리므로 타인에게 예수처럼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이 되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이고
서로 사랑함이란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살아있는 길로 가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증인이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을 받아 신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표적을 구하기보다 서로 사랑하므로 타인에게 선생이 아니라 몽학 선생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를 도와줄 뿐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생인 진리와 천국을 알게 하고 또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영으로 이를 요한복음16장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 준다고 기록하고 있고 성령 훼방이란 증인의 삶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기보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천국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피조물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그 영생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구약의 묵시를 따른 십자가의 사건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처럼 온전함 그 자체이기에 십자가 사건이 있던 없던 어떤 방법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인자로 오신 예수가 복음과 증인의 몽학 선생이되어 가르치는 그 무엇으로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알 수도 표현할 수 없는 없을 뿐 아니라
피조물의 어떠한 수고나 노력을 비롯하여 재물인 희생양이 절대로 필요치 않기에 어떤 누구도 죄인으로 만들거나 분별하지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것임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지금까지 몽학 선생이 되어 한편으로는 복음으로 안내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게 하는 예수를 비롯하여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삼위 일체, 율법, 십자가, 성찬, 세례, 동정녀, 성령잉태, 원죄, 기도, 예배, 제자, 찬양 등을 비롯하여
복음을 가로막는 표적이 되는 몽학 선생의 옷을 한 겹씩 모두 벗는 천국을 소망하며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 표적을 구하므로 성령훼방을 하기보다 서로 사랑함으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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