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의 승천을 기준으로 승천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로 사도행전은 승천 이후의 사건을 기록한 것임을 말하고 있지만 문제는 승천으로 표현된 것도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것이고
또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기록한 것을 우리들은 참으로 믿고 있지만 이것도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한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실체는 피조물의 불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절대로 온전하게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피조물이 아니라 온전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
예수의 사역은 그 무엇인 복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스스로 회개하고 그 온전한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직접 우리들에게 그 복음과 그것을 소유하여 누리는 증인의 모본을 보여주는 최고의 몽학 선생으로 증인이 되는 것이기에
승천이나 부활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인 예수가 당신의 사역을 위하여 보여준 외모의 일부임에도 그 자체를 참으로 알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종교가 되면 영원히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실족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 때
복음서 즉 승천 이전에는 예수가 우리들에게 당신이 바로 그 복음의 몽학 선생인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택한 그들을 비롯하여 성경기자는 그 예수를 하나님을 아들로 착각하여 표적으로 구하므로 종교가 되었고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승천 이후에 기록된 것은 그 종교를 위하여 택한 그들과 바울 등을 그 예수의 제자 또는 사도로 미혹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이는 복음의 무지로 택한 그들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또 증거하도록 예수께서 주신 권능과 오순절 날 오신 성령을 분별하지 못한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복음으로 말하고 있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역사는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너무나 대단하게 보이는 모든 권능의 역사들이 바로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신기루임을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권능은 성경 기자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이나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로 표현된 것으로 결국 오순절 날 보여준 그림은 회개 없이 성령을 받으려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현장이고, 또 종말과 심판의 분위기로 주신 권능을 역동적으로 역사한 현장으로 바로 알아야
우리 모두는 그런 몽학 선생을 표적으로 구하기보다 몽학 선생의 옷을 벗으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처럼 이 세상이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그림이 바로 당신처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것이고
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표적을 구하는 그들과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여 기록하므로 심판이니 재림이니 엉뚱한 헛소리로 미혹하여 종교의 기득권 자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림처럼 우리들은 예수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처럼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스스로 그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여 기록한 것이고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사십일 동안 보여주신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을 승천과 재림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이고
모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그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라고 하는 것이나, 구약을 빙자하여 가룟 유다를 죄인으로 확증하고 12명을 맞추기 위하여 그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선출하는 등의 그림은 복음과 증인의 최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으로 세우기 위하여 합리화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는 그림은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처럼 이미 말씀한 대로 성령 세례를 받는 모습이고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는 그림 등은 그 무엇인 보혜사 또는 진리의 성령이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외모로 판단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대단한 것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당황하여 놀라는 모습이기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는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회개하고 그 무엇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보다 술에 취한 것처럼 새로운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구하는 표적의 선생이 되기 위하여 자랑하며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고 외모를 따른 현실의 잣대로 그런 자신들을 합리화 할 뿐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복음의 무지로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복음의 외모를 묵시로 표현한 구약의 말씀까지 빙자하여 마치 복음을 부활인 구원과 심판의 선포처럼 합리화 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구약을 비롯하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십자가 사건을 통한 부활이 구원의 결과처럼 그리고 그 예수를 복음의 실체처럼 미혹하고 빙자한 베드로 복음과 베드로 교를 종말과 심판으로 미혹된 그 시대의 대안으로 하루에 삼천명이란 능력과 함께 제안하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종말론자들처럼
복음의 무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므로 증인이 되라고 주신 능력을 이 세상을 위한 종교를 위하여 오용하고 남용하므로 그 외모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이것이 바로 증인이 되기보다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짓으로 종교가 되어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임을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성전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그냥 지나쳐도 무방함에도 회개하지 않고 임한 성령을 주체하지 못하고 예수와는 달리 일부러 다가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그림이나
베드로 말대로 앉은뱅이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란 백성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그림이나
우리들에게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과 증인으로 오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온전하게 걸어가신 것을 외모로 판단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는 그림은
자신들의 표적과 종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예수처럼 보이려고 일부로 앉은뱅이를 고쳐 이목을 집중한 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빙자하여 무리를 죄인으로, 베드로를 비롯한 택한 그들에게 속한 무리는 의인으로 선포하고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그들의 무지함을 용납함과 아울러 그 무지로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아시고 선지자로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이니 이를 감사하며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 바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복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종교임으로 바로 알 때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그 무엇인 복음을 너무나 대단한 최고의 목학 선생인 예수로 착각한 것이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것이고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모세 자신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라는 것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멸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는 말씀을 더 강조한 것임에도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는 것은
복음의 무지로 스스로 도덕천을 만들어 불가능에 도전한 자신들의 불의와 불법을 깨달아 회개하기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이 세상의 조건인 정통성의 자랑으로 내세우므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며 점점 멀어지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에도 믿는 남자가 오천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은 자신들의 온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존 종교인들과 종말론자 또는 이단이라고 하는 종교단체들의 키 재기 모습이고 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기득권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이단을 내몰기 위한 재판으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는 그림은
정답이 없는 도덕천의 잣대로 착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이 세상의 논리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당신들이 하지 못하는 그 능력이 예수로부터 왔다고 한 후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로 판단하여 구약까지 빙자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고 있지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란 의미는
건축자들 즉 도덕천인 율법으로는 모두가 버린 돌이 되지만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면 새로운 피조물인 머릿돌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바로 알 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은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고
또 보여주는 많은 그림은 도덕천인 율법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이단 논쟁으로 결국 자신들의 주장인 종교가 정답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미혹하는 것으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는 그림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로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기보다 회개하지 않아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잔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채우기 위하여
선무당이 사람 잡듯이 이 세상의 잣대로는 복음의 외모인 부활과 승천, 종말과 심판을 당근과 채찍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새워 표적을 구하는 참으로 황당한 엉터리 쇼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당당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도덕천의 잣대로 살인한 그림이 바로 복음에 무지한 선무당 베드로가 사람을 잡은 것이고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는 그림도 예수를 삶을 모방한 것으로 그 중심은 하나는 일상이고 하나는 목적이 있는 사역으로 전혀 다른 것이고
대제상장과 사두개인 즉 기득권 세력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주의 사자에 의하여 벗어났다고 하면서 계속하여 백성을 가르치자 다시 체포해 왔다는 그림도 내용의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고
심문과 이에 대항하는 강력한 주장으로 당연히 정답을 찾지 못하자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그림처럼 복음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기득권을 위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법임을 계속 주장하며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는 것은 이 글의 기자가 자신들의 표적과 종교가 정답임을 믿고 이를 주장하기 위하여 목숨 걸고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무지에 의한 것으로 이렇게 순교를 각오로 표적과 종교를 위한 투쟁이 오히려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이 아니라 종교로 인하여 사람이 많아짐에 따른 당연한 문제를 이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틀을 만들자 당장의 현실은 관리가 편리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여 부흥하는 교회처럼 외모가 아름답게 보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하나님의 뜻으로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곧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부패하여 죽어가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지난 역사나 지금의 현실에서 계속하여 보여주며 증거하고 있음에도 지금의 크리스천들처럼 그 때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들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성령 충만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다고 하지만 이는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권능을 자신들의 자랑과 종교인 이 세상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주변 사람들은 이를 광신이라 외면하는 것을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착각하여 더욱더 용감하게 한계를 벗어나 발악하자
복음의 무지로 지금의 현실에서도 스스로 정통이라 착각한 기득권을 가진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단으로 평가한 교회들에게 모든 것을 사용하여 핍박하는 것처럼 서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종교와 기득권을 위한 발악을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여 목숨을 걸고 도토리 키 재기 하는 모습을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멋대로 평가하고 표현하여 기록함으로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이 표적의 옷을 벗어야 즉 회개해야 복음으로 복음이 되어 이 세상이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릴 수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제사장까지 동원하여 스데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는 구약의 말씀을 3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라 하였고 스데반은 모세라 하면서 하는 설교를 우리들의 이전 믿음으로 보면 참으로 합당한 것임에도 왜 그들은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기보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는지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이미 묵상한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복음의 몽학 선생인 아브람 가문과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도덕천의 옷을 벗기보다 더 잘 입고 선생이 되기 위하여 자신들만이 그 몽학 선생의 적자처럼 착각하여 선과 악으로 분별하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하여 그 몽학 선생을 표적으로 구하므로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 때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는 그림은 문경 십자가 사건처럼 요쯤도 가끔씩 보도되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로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무지로 회개 없이 복음인 진리의 성령을 받으려는 발악이고 또 예수께서 택한 그들에게 천국을 증거하라고 주신 권능과 진리의 성령인 복음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스데반이 계속 발악하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는 그림처럼
기존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처럼 신성 모독이기에 당연히 돌로 쳐 죽인 것이고 예수를 복음의 몽학 선생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를 위한 표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착각한 스데반으로서도 당연히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는 그림처럼
스스로 착각하여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장렬한 순교를 한 것이고, 복음의 무지로 이를 참으로 판단하여 표현하고 기록함으로 결국 지금까지 복음이 아니라 종교를 위한 순교의 모본이 됨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위한 최고의 순교로 칭송함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대표로 사울이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며 스데반 쪽의 사람들을 박해하자 일부는 흩어지고 또 일부는 스데반을 장사하며 죽음을 애통하는 그림은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사울을 대표로 하는 기득권을 가진 쪽에서는 반정부 인사인 신성 모독의 잔당들을 소탕하려는 것이고 반대편에서는 오히려 대단한 용사인 그들을 영웅으로 세우는 당연한 그림이고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그림은 그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반목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성경기자가 그 한쪽을 부각하기 위하여 성령이 아니라 권능을 따른 빌립의 행적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것이고
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보여주는 그림을 보면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라고 마술사 시몬을 높인 후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그 마술사 시몬도 빌립의 권능에 굴복하여 제자가 되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는 그림에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은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직 그들의 종교를 위하여 말하는 것으로 성령 내리신 일이 없다고 표현된 것은 지금의 현실처럼 교단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는 그림은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안수를 받으므로 공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라는 그림은 세상 이치에 밝은 시몬이 지금의 목사나 신부처럼 돈으로 그 공인된 직분을 사겠다는 것이고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는 그림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목사나 신부 스스로 자신들의 직업을 성직자라고 높이는 것처럼 그 직분을 높이며 또 그 직분에 대항하면 저주를 하자 이에 시몬이 지금의 우리들처럼 바로 꼬리를 내리며 굴복한 것이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는 그림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성령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미혹하는 것으로 그래서 더러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빌립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으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게 한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아주 자랑스럽게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이 복음보다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우리들은 그 몽학 선생의 옷을 벗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울이 앞장서서 신성 모독의 잔당들을 소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그림인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우리들은 기자의 의도대로 신비한 외모인 현상에 너무 집착하여 본질을 놓치고 있었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함께 동행하는 무리 중에 오직 사울만 그 신비를 경험했다는 것은 결국 사울이 무엇에 홀린 것처럼 환상에 이끌려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을 자서전이나 신앙 간증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건이 사실이면 그 사건이 일어난 핵심은 빛이나 예수의 음성이 아니라 앞길이 창창한 대단한 사울이 갑자기 실명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바울에게 실명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처럼 현실뿐만 아니라 자존심에 있었어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요 절망이지만 그 핵심은 아무리 대단한 피조물도 피조물 스스로 그 한계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너무 미약한 존재임을 깨달아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수로 생각한 아나니아로 인하여 다시 볼 수 있게 된 사연들을 아름답게 각색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원수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은 사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 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울이 쌓아 올린 대단한 그 모든 것이 피조물의 한계 앞에서 무용지물로 신기루임을 확인하며 오히려 예수를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배교를 한 것이고 기득권 측에서는 당연히 배교한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결국 보여주시는 그림은 배교한 바울은 복음이 아니라 오히려 배교한 자신의 명분과 생명을 위하여 이전의 열정보다 더 강력하게 표적인 예수를 따라가려고 발악함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애니아라고 팔 년을 중풍으로 고생한 사람을 낫게 한 것이나,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나사로처럼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복음에 무지로 베드로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보다
온전한 성령이 오셨기에 회개함으로 이미 버려야 할 권능을 오히려 행사하므로 증인이 아니라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종교의 제자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면서 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고 하면서 보여주시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도덕천으로 자신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결과를 아름답게 각색한 것으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는 말과는 달리 성경의 기록이나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도덕천인 하나님의 잣대는 온전한 의나 공평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고
또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는 말과는 달리 예수는 성령과 능력(권능)을 선한 일에 올인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사용함으로 오히려 인색했음을 성경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또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복음이 아니라 부활 사건의 증인은 그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기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는 말과는 달리
예수는 우리들에게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전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복음이 된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 예수는 재판장이 아니라 천국과 복음의 몽학 선생이었고, 모든 선지자가 증언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복음이었고,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처럼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는 그림처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권능은 방언처럼 외모로 확인이 가능하기에 이를 성령으로 미혹하여 구하므로 종교가 되어 외모인 표적을 구하고 있기에 오히려 진리의 성령인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비난하는 그림과
어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는 그림을 비교해 보면
초대교회12사도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들이 얼마나 복음에 무지하며 그들 역시 그들이 비난한 기득권 세력과 똑 같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동역자들의 비난에 대하여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고 공의보다 외모를 따라 판단함으로 권능을 성령으로 착각하여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성령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 받으라는 것을 세례를 받으라고 착각하여 미혹하며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그들의 외모를 예수를 빙자하여 자신의 실적이나 능력처럼 주장하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복음으로 복음이 된 증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와 기득권을 위하여 정치인들처럼 야합하여 외모로 보면 상생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그림은
공권력에 의하여 죽은 스데반으로 인하여 흩어진 그들이 지금의 이단이라고 하는 단체들처럼 다시 비밀스럽게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며 세력을 확장해가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지금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그 세력을 공적으로 인정하여 흡수함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는 그림은 사울도 그런 방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고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는 그림은 마태복음 11/13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결과를 두고 선지자까지 동원하여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는 그림처럼 보기 좋은 명분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자신들의 종교와 정당성을 주장함으로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는 그림은
헤롯 왕이 중심이 된 기득권 측에서 보면 이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체포된 요한의 형제 야보고를 죽이고 베드로도는 무교절을 지난 후 죽이기 위하여 수감 중에 탈옥이 이루어졌는데 이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체포 당시 지독한 심문으로 생사 갈림길에 있었다고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것이 용도 폐기된 권능의 역사라면 모르지만 복음과도 상관 없을 뿐 아니라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이라면 성경 전체의 흐름과도 반하는 오히려 불공평한 처사가 됨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감중인 베드로의 갑작스런 출현에 당황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미혹할 뿐 아니라 헤롯의 죽음은 생로병사를 따른 당연한 이 세상의 일임에도 하나님께서 직접 관섭하신 것으로 미혹함으로 오히려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 뿐 아니라 복음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함에도
이를 두고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하므로 복음을 가릴 뿐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고 하면서 복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행하는 불의와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는 그림은 자신들이 선택으로 목사나 신부가 된 것이나 크리스천들이 주변의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혹하는 것처럼 선교사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택해 놓고 이를 성령님의 뜻처럼 미혹하는 것이며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그림은 선교보고회처럼 결과를 두고 바나바와 사울 특히 사울을 높이는 신앙 및 선교 간증이고
일정과 주변 환경을 설명한 후 보여주는 그림은 모세나 스데반처럼 설교를 하는 것이데 특이한 점은 사울의 지난 경력으로 가능한 것이겠지만 회당에서 한다는 것과 13장28~31절에서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빌라도가 죄 없는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가 죽여 달라고 했다는 표현이고
10장39절에 이어 자신들로만 증인을 제한하므로 복음이 아니라 부활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한 표적의 증인을 말하며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차별을 할 뿐 아니라 13장32절부터는 복음의 무지로 정답이 아님에도 정답처럼 착각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너무나 심각한 말을 용감하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은 이단이 아니라 구약을 따라 말하는 정통으로 성경 기록을 빙자하여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의 부활로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기에 오히려 율법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고 하자
이로써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천주교에서 기독교가 분리되어 나오는 것처럼 좀더 가볍고 넓은 틀의 종교를 제시하니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기존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반발하는 것이고 또 이것을 빙자하여 이방으로 자신을 종교 영역을 확장하는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복음의 무지로 도덕천을 빙자하여 또다른 종교와 표적을 만드는 것으로 복음을 가리는 악하고 음란한 생각인 불의와 불법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다는 것처럼 결국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리되어 복음과 상관없는 세력싸움에서 기존 종교인 유대교의 힘에 예수교가 밀렸지만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과 상관없는 권능인 초능력을 행사하자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고 하는 것처럼 초능력의 가진 우상 신들의 현몽이라고 환영하고
이에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된 것이 무리들의 무지가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의 증인이 아니라 선생이 되었기 때문임에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고
그래도 바울답게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방임이란 표현으로 비슷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에덴 동산에서 퇴출한 이유가 바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는 그림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이단을 소탕하려 가는 것처럼 이제 힘의 논리와 바울의 배교로 이단이 되어 소탕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명분과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고난을 하나님의 뜻처럼 빙자하여 미혹하는 것이고
또 이런 자신들의 불의와 불법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는 것처럼 금식 기도를 명분으로 재갈을 물리는 것이 지금까지 악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물론 예수교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13장40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라고 말의 실상이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는 계속되었지만 총본부인 예루살렘에서까지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은 종교 개혁으로 탄생한 예수교에서도 초기부터 하나가 아니라 분쟁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라는 것처럼 각자 복음으로 복음이 된 증인이 아니라 선생이 되기 위한 자신들의 명분과 종교의 답을 찾기 위하여 마라톤 회의 중에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에게 율법에 반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 적이 있기에 결국 바나바와 바울과 같은 편이 되어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주장함으로 자신의 이전 주장이 더욱더 경고하게 됨으로 이방으로 영역을 넓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는 말로 기를 꺾고
바나바와 바울이 권능인 초능력을 행사하며 이룬 대단한 업적에 대하여 이미 권능을 성령으로 착각하여 배를 채운 그들이기에 오히려 발목이 잡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것처럼 명분까지 잃어 말을 못하고 있자
기존 교회의 모습처럼 그들 중 합리주의 자인 야보고가 나서 본질보다 상생을 위하여 구약의 말씀까지 빙자하여 결국 외모를 보면 모두에게 달콤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고 복음과 상관없이 오직 자신들의 명분과 종교를 위한 제안을 하자
일사천리로 의기투합하고 형식을 갖추어 예수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명분과 종교를 위하여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니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기뻐하며 각자 열심히 종교를 위하여 헌신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의기 투합하여 하나가 되었다고 자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누구보다 온전한 하나처럼 보인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으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음에도 예수를 빙자한 바울교가 견고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하게 된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함으로
지금까지 내려오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표적으로 바울을 닮아 가려는 수많은 교회들이 오늘도 일어나고 있지만 야보고처럼 합리적인 지도자도 없고 베드로나 바울처럼 초능력이 부족하여 상생하기보다 대부분 이단으로 배척당하며 자족하지 못하고 허공 속으로 살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더러는 살아남아 종교로 인정받고 이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요지경의 이 세상이 되는 것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로 서로 사랑하기보다 도덕천을 따라 이 세상의 유익과 칭송을 바탕으로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 되어 외모는 멋있게 보이지만 바나바와 바울처럼 결국은 우리가 아니라 내가 됨으로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복음을 가리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이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디모데를 제자로 삼아 데리고 가기 위하여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인 이 세상의 요구에 따라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참으로 야비하고 비열한 바울의 모습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며 갈라선 후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바울 자신의 단독라인인 바울교를 위하여 총본부에서 그렇게 투쟁하여 얻은 자신의 주장과 명분도 자신의 성공과 유익을 위하여 가감하게 버린 이 세상과 야합하는 비겁한 모습이기 때문이며
또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없이 바울의 그런 교묘함으로 이 세상과 잘 야합하며 바울교가 승승장구해가는 모습과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바울의 선교 여행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뜻과 사역으로 착각하여 미혹하는 것이기에 이는 결국 복음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사역인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바울교의 성공을 위하여 그렇게 발악하는 것임에도
이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루디아란 여인이 그런 바울의 거물에 걸려 든 것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다며 요쯤의 말로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하여 미혹하며 또 지금도 주변에서 믿음의 척도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으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업인 바울교를 위하여 귀신 들린 여종으로 표현된 무당과의 영적을 빙자한 영역 싸움에서 이긴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고
그 여종의 주인에게 영업을 방해한 협의로 고발되어 관리에게 폭행을 당하며 체포되었지만 바울이 로마 사람임을 알게 된 관리가 당황하여 당연히 두려운 마음으로 방면하자 그런 바울을 대단하게 본 간수가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접대할 때
바울이 자신의 영업인 종교를 위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는 말에 현혹되어 세례를 받으므로 바울 교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일임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베드로의 그림을 모방하여 폭력과 구속에 의연하며 기도와 찬송을 하자 이를 본받아 일제시대 때 우리 선배들도 그렇게 했지만 이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하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 예수의 죄 사함의 사역인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쳐 구원을 받게 하는 사도로 착각하여 미혹함으로 결국 바울이 말하는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는 바울교가 최고의 종교처럼 말하고 있지만
구원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고 복음으로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 집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여준 바울의 행위는 복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비치는 자신의 자랑인 외모와 자신의 종교인 바울교를 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이 오늘날의 유명한 부흥 목사처럼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바울교로 이름을 날리며 데살로니가에서 하는 부흥회에서 바울의 유창한 설교로 바울교를 믿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직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공권력까지 동원한 방해로 위협을 느끼고 데살로니가에서 도망 나와 베뢰아에서 부흥회를 하자
그 반응은 데살로니가에서 보다 좋았지만 역시 유대교의 방해로 실라와 디모데만 남기고 바울만 먼저 바다 길로 도망하여 아덴에 도착한 후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에
어쩌면 지금 우리 조각바람의 생각처럼 눈에 비취는 아덴 사람들이 정답을 찾기 위한 발악으로 오히려 혼탁하고 혼미해진 그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의분으로 바른 길로 알려주기 위한 선생이 된 바울이 종교인을 비롯한 상인과 철학자를 불문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참이라 확신한 바울교의 표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보여주자
자칭 최고로 알고 최고를 추구하던 그들에게 본질이요 참인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복음으로 복음이 된 증인 예수 껍질의 일부인 십자가와 부활만으로도 당연히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뿐 아니라 놀라고 신기해하며 관심을 가지자
이에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멋진 선생이 되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피조물의 도움이 필요 없는 완벽한 신을 소개하며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념의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설명하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복음의 무지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복음의 외모를 설명하며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고 복음의 껍질인 부활을 복음의 본질처럼 설명하자
당연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생겨나지만 이를 외면하며 심판자의 모습처럼 외부의 핍박이 없음에도 바울 스스로 그들 가운데서 떠남으로 그들 스스로 분명하게 결단하게 유도하는 것도 역시 바울다운 모습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은 그런대로 비슷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문제는 바울 자신이 비슷하게 알기만 할 뿐 복음이 되지 못했기에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소유하기 위하여 그림처럼 증인이 아니라 선생이 되려고 발악하는 것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이 아덴을 떠난 후 이번에서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같은 직업과 쫓겨났다는 비슷한 처지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함께 또는 이용하여 부흥회 또는 목회를 하고 있는 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는 그림처럼
실라와 디모데까지 도착하여 합류함으로 더욱더 열정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오히려 참담한 실패로 돌아오자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대단한 선생과 심판자가 되어 그들을 원망하며 화를 내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방으로 향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교묘하게 합리화하면서
목회 또는 부흥회를 실패했기에 이제는 회당에서도 못하고 겨우 같은 교인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했지만 결과는 거물인 회당장 그리스보 가정을 비롯하여 오히려 성공을 하자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미혹하며 1년6개월 동안 목회를 잘하고 있었지만
현실 정권이 바뀌자 다시 기존 기득권 세력인 유대교의 핍박이 시작되었고 이에 바울이 반론을 하기도전에 정권의 주체가 종교 문제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현명하게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아니라 분리를 명명하자 서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세력 싸움을 하다가
결국 바울이 견디지 못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수리아로 떠나가며 머리를 깎으며 더욱더 마음을 굳게 먹고 에베소에 도착하여 혼자 회당에서 자신과 자신의 종교를 강하게 주장하자 오히려 잘 먹히게 되었지만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을 빙자한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에베소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안디옥으로 내려가 얼마 있다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으로 다니며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는 것이고
바울이 그렇게 하는 동안 에베소에 남아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는 바울교의 대단한 원석 같은 아볼로를 보석으로 잘 가공하여 아가야로 파송하자
어쩌다 크게 성공한 선교사들처럼 성공했는데 이것은 자신들 종교의 일시적 성공임에도 복음인 여호와의 승리라고 미혹함으로 여호와를 폄훼하며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바울교의 대단한 일꾼이 된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활동하고, 바울은 머리를 깎는 결단으로 성공한 에베소로 다시 돌아와 복음이 무지로 성령을 초능력으로 착각하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그림처럼 목적을 두고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하며
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는 그림은
참으로 황당하게도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는 베풀고,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자신은 성령의 세례를 베푸는 것처럼 미혹하여 신기 있는 사람이 무당에게 신 내림 굿을 하는 것처럼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여 변질하고 있지만
우리의 구원은 세례가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지금도 방언이나 예언 등 성령의 은사로 미혹된 것을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며 산 기도니 뭐니 하면서 발악하는 것은 바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하나이고 내림 굿임의 하나 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는 그림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리인 천국이 아니기에 증인이 아니라 선생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분별하여 구분하니 당연히 바울교는 노력한 만큼 부흥이 일어난 것이고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는 그림은
초능력을 하나님을 빙자한 성령의 역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부흥강사의 모습이고 복음과는 무관한 것임에도 지금도 자신의 사업인 목회를 위하여 이런 초능력을 사모하는 목사들처럼 당연히 초능력을 사모하는 것이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는 그림은
예수 믿는다고 큰소리 치며 의기 양양하게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말한 벌을 받아 고난에 빠지면 무당을 찾으며 심하면 굿을 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고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는 그림은
반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무당들을 비롯한 타 종교의 영업을 방해하는 참으로 한심한 악을 발하므로 지금의 현실처럼 무당이란 직업을 멋대로 비하하며 사탄이라고 왜곡하지만 그 차이점은 단지 표적을 예수로 한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하고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는 그림은
기존 종교인들이 이단으로 명명한 종교 단체가 그 외모가 바울교처럼 승승장구며 커지자 기고만장하여 드디어 이 세상을 향하여 자신들의 종교가 정답처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바울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고
복음에 무지한 바울과 바울교의 사람들이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의 말씀이나 모습과는 달리 예수의 이름으로 기독당을 만드는 것처럼 안하무인하고 기고만장하여 결국 영역과 이권 싸움인 종교분쟁이 일어났지만
지혜로운 관리가 싸움의 본질인 종교로 포장된 악취 나는 영역과 이권의 종교분쟁임을 간파하여 잘 마무리 한 것을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려고 기록하고 있지만 복음과는 전혀 무관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종교분쟁이 지혜로운 관리에 의하여 일단 정리가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여 기고만장하게 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와 헬라에서 바울교를 전파한 후 수리아로 가려고 할 때
기득권 세력인 유대인의 위협으로 목적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다시 원점인 아시아로 되돌아 갔다는 실패의 그림에 지금까지 포섭된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드로비모, 두기고가 먼저 드로아에서 바울 일당을 기다리고 있다고 함으로 실패를 성공처럼 미혹하며
또 성공을 위한 절박한 심정의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중까지 계속된 무리한 강론에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져 졸도한 청년 유두고가 다행이 깨어난 것을 예수님의 모습을 빙자하여 바울이 죽은 자를 살린 이적처럼 미혹하여 의미를 부여한 후 바울 자신의 계획대로 위협 세력의 시선을 피하여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조직을 나누는 등 작전을 세우고
자신의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고
지금의 목사나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처럼 바울 자신의 외모요 종교의 표적인 예수를 위하여 스스로 자초한 고난과 수고를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위하여 한 것으로 착각하여 미혹하며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지금의 선교사나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처럼 바울 자신의 외모요 종교의 표적인 예수를 위하여 스스로 자초한 고난과 수고를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는 것처럼 대단히 멋있게 자신을 선택을 포장한 후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는 그림은
절대 하나님의 사역이요 뜻인 복음이 아니라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가 죽음 앞에서 자신의 노력과 수고가 손에 잡히기보다 신기루처럼 자꾸만 사라지자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눈을 감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 놓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업을 이끌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자신의 이름이 남길 바라는 부질없는 마지막 발악처럼
바울 역시 자신은 죽어도 자신이 목숨 걸고 추구한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자신의 종교가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또 다른 의미로 자신의 영생을 추구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과 뜻인 복음이 아니라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정에 의지하는 부질없는 발악이요 표적인 종교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이 주변의 환경을 잘 이용하여 지혜롭게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인의 눈을 피하며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고스와 로드와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도착하여 이레를 머물러 있는 중에 제자들의 환영과 예루살렘 가지 말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목적을 따라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빌립 집사 집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그때 예언하는 빌립의 딸이 말하는 바울의 앞길에 대한 불길한 예언을 듣고 다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았지만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요 사역인 복음과는 상관없이 바울 자신의 종교 표적인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란 명분으로 증인이 아니라 선생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제자 나손의 집에 여장을 풀고 드디어 야보고를 의장으로 하는 이단 심의위원에 앞에서 바울 자신의 대단한 실적을 보고하자 그 외세에 눌린 위원장 야보고가 문제가 된 네 사람의 입당 비용을 부담하여 입당을 하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종결하자는 제안을 수용하여 서로의 상생을 위하여 복음과 상관없는 쇼로 사건을 마무리 했지만
법과는 상관없이 바울로부터 피해와 상처를 입은 자가 자신의 기득권으로 군중을 선동하여 신성모독죄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현행범으로 착각한 관리가 바울을 체포함으로 오히려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바울이 가진 외모인 조건들로 인하여 입장이 바뀐 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사역인 복음이나 성령의 역사 등으로 미혹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바울이 가진 외모인 조건들로 인하여 입장이 바뀐 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사역인 복음이나 성령의 역사 등으로 미혹하기 위하여 기회를 잘 포착하여 신앙 간증을 시작하는 것으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보여준 그림은 결과를 두고 환상과 현실을 멋대로 해석하여 복음과 상관없는 자신의 야망과 표적인 종교를 따라 스스로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합리화 하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착각하는 것이고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는 그림은 바울의 생각으로 모두가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멋있고 대단하게 잘 설명했는데 결과는 신성모독의 죄를 벗지 못하고 이미 확인한 것처럼 공개 처형의 위기에 처했는데
이것을 민중의 소요나 현행범으로 착각한 관리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또 자신이 가진 기득권인 외모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여 16/26절에서는 비슷한 사건을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바울 자신의 야망과 표적인 종교를 위한 것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는 어제 보여준 마지막 그림처럼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의 체포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천부장이 고발인과 피고발인을 모두 세우고 심문을 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처지를 착각한 바울이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하자 이를 제지하는 대제사장의 경고를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말하므로 결국 무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바울이 계속하여 신성을 모독하는 것임에도
자신을 처지와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착각한 바울이 출애굽기 22장28절의 말씀을 빙자하여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관리인 대제사장을 비방하며 인정하지 않는 웃기는 모습이 바로 오늘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착각하여 그 예수의 이름으로 관리를 비방하며 개혁을 부르짖는 복음에 무지한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고
복음의 무지로 개혁을 본질로 착각한 종교인들이 정치적이 이슈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지혜가 출중한 바울이 본질인 복음이 아니라 도구인 부활을 이슈로 교묘하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이간하는 여론 몰이를 하며 핵심을 흐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며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그림은 결과를 두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종교인 바울교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그렇게 복음의 무지로 바울 자신만이 정의처럼 참담하게도 예수를 빙자하여 신성을 모독하며 현행 질서를 무시하는 바울을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은 실정법이 아니라 당연히 종교법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의 생질이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알려주고 백부장을 통하여 관리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밀고하자 지혜로운 관리인 천부장이 기록된 그림처럼
그들의 종교문제와 정치문제를 분별하여 정확하고 공평한 판단을 위하여 상급기관인 총독으로 이송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사역인 복음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일상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득권 종교인들이 천부장이 총독에게 이송한 바울은 신성을 모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로 사회 기강인 기존 종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다시 벨릭스 총독에게 고발장을 접수하자
이에 총독이 바울에게 고발장의 내용을 확인하려고 심문하자 고발인들은 바울의 전체 행실을 두고 고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야보고야 야합한 12일간의 예루살렘에서 만의 행동으로 무고함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고 하는 것처럼
사실은 바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 종교의 열매가 부활임에도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 난 일로 자신은 그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청렴결백하고 구제를 비롯하여 종교가 추구하는 바를 따라 좋고 선한 일을 많이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결례도 다 지켰고 또 이에 반하는 어떠한 모임이나 소동이 없었다는 무고함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고 하는 것처럼 그 종교의 핵심이요 열매는 오직 부활뿐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행한 바른 일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총독 벨릭스도 이 사건은 종교의 문제일 뿐 일반 사건이 아님을 알고 미숙한 판단으로 문제를 확대하기 보다 지혜롭게 서로 알아서 합의로 해결되길 기다리며 문제없는 적당한 선에서 유보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깨닫기보다
오히려 벨릭스 총독을 비겁하고 야비한 공무원으로 왜곡함으로 바울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여 주고 있는 모든 그림은 그냥 이 세상의 일상일 뿐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의 신성모독 고발 건은 벨렉스 총독 임기 중에 해결하지 못하고 후임 베스도 총독이 부임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제안한 예루살렘 법정을 바울이 거부하고 로마 법정에 상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직 바울 자신의 종교인 바울교를 위하여 일반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외모인 신분상의 기득권을 이용하는 것으로 결국 자신이 그렇게 목숨 걸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바울교의 표적인 예수나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가이사를 의지하는 것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는 그림처럼
이에 대하여 베스도 총독이 민족 종교의 문제인 사건의 속성상 바울의 상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 중에 방문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도 일반 사건이 아닌 종교 사건을 두고 바르게 처리하기 위하여 고민하는 관리의 모습일 뿐 하나님의 뜻이나 사역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자 이에 바울도 일반의 사람들처럼 목적을 두고 교묘하게 아그립바 왕을 높이며 자신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실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누구보다 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으며 지금 여기서 심문을 받는 것도 큰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위한 신앙심 때문인데
그것은 바울 자신도 처음에는 무지함으로 유대교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만난 이상현상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말한 메시아아가 나사렛 예수로 그는 우리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이며 바울 자신을 그 일의 종과 증인으로 삼았다는 자신의 착각과 환상이 진짜요 참이라고 주장하며
세례 요한의 모습을 따라 온 유대와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복음도 아니고 유대교도 아닌 오직 바울교의 주장으로 당연히 기득권 측에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이단인 바울을 죽이려고 했지만
바울 자신의 기득권인 외모로 여기까지 버티어 온 것을 하나님의 도움이요 뜻처럼 미혹하며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성경을 바로 따르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전혀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더 담대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하자
이에 베스도 총독은 미쳤다고 하면서 그래도 네 많은 학문이 미치게 했다며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망상에 빠져 감히 감언이설로 자신을 세뇌하려고 한다고 화를 내며 참가한 모든 사람의 결론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는 것처럼
지금도 개혁을 부르짖는 진보 성향의 기독교인들처럼 바울의 주장은 종교의 문제를 정치로 풀려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이나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참으로 미친 짓이고 교만한 짓임을 먼저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복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므로 복음으로 복음인 된 새로운 피조물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합당한 일이 되는 것이고 또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도덕천에 따른 착하고 선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의 상소로 바울을 가이사 법정에 세우기 위하여 로마로 가는 배편인 아드라뭇데노 호에 바울을 포함한 가이사 법정에 세워야 하는 죄수를 호송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출항하여 이달리야와 시돈, 무라시, 항구를 거쳐 라새아시에 가까운 미항에 도착하여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는 그림처럼 절기를 보내고 출항을 위해서 백부장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당연히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임에도 결과를 두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문제 있는 것처럼 기록한 것이고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라는 그림처럼 선장과 선주의 판단을 따라 뵈닉스로 가기 위하여 출항하여 순항 중에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했는데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그림처럼 지금의 시대에도 불가항력인 자연 재해인 결과를 두고 비겁하고 교묘하게 약점처럼 미혹하여 바울 자신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고 원망함으로 바울을 드러낸 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는 그림처럼 복음에 무지한 바울이 결과를 두고 신앙 간증을 하는 것처럼 가이사 범정에 상소한 것이 하나님의 뜻처럼 미혹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보여준 긴 그림처럼 그렇게 절박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결국은 이백칠십육 명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에 따라 무사히 상륙했다는 대단히 박진감 넘치는 해피 앤딩의 드라마 같지만
이런 사건은 지금도 가끔씩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관섭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작품으로 왜곡 변질하는 것은 자신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인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며
바울 일당이 무사히 상륙한 곳은 알고 보니 멜리데라는 섬이었고 그곳 원주민들이 그들을 인도주의 입장에서 당연히 도움을 주고 추위를 피하도록 불을 피웠는데 바울이 나무속에 있는 뱀에게 물려 벌을 받는 줄 알았지만 죽지 않자
오히려 대단한 초능력자로 생각 한 것으로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뱀에 물린 사건을 매개로 가진 초능력이든지 앞선 문명의 이기이든지 추장을 비롯하여 원주민과 떠날 때까지 좋은 관계를 맺고 그렇게 겨울 석 달을 잘 지난 후
로마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로마로 무사히 들어가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로마에 있는 제자와 친지들의 마중을 받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더 용기를 얻었다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에 도착한 후 로마에 있는 유대인을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카멜레온처럼 로마인 앞에서는 로마인으로 유대인 앞에서는 유대인으로 색깔을 바꾸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종교와 정치를 이용하여 결국 바울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바울의 사건은 우리 주변에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이단으로 평가한 종교 단체를 공지하지 않는 것처럼 당자자 이외에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기에 당연히 로마에 공지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장로교에도 수백 개의 파가 있는 것처럼 유대교에도 사두개 파와 바리새 파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파가 있을 것이고 또 당연히 서로 기득권을 위한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어떤 파가 또 무엇을 주장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것임에도
복음의 무지한 바울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울이 자신의 종교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많은 준비를 한 후 그들을 초청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득하기 위하여 발악을 하였지만 당연히 기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자 이에 실망하여
구약인 이사야서의 말씀을 빙자하여 자신을 대단한 사람을 착각하여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고 하면서 저주하는 참으로 미숙하고 한심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는 그림처럼
복음으로 복음이 되기 위한 기본인 회개보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 그리고 이 세상의 조건 등 대단하게 보이는 외모인 이 세상의 것으로 복음을 이해하여 자신의 잔에 담으려고 하기에 그것은 영원한 불가능의 도전이 됨을 바로 알아야 할뿐 아니라
성경으로 기록 된 로마서가 바로 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불가능에 도전한 기록이고 또 그 이외의 서신서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기간 동안에 불가능에 도전한 기록으로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표적으로 하는 바울교가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종교가 되었지만
오히려 도덕천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요 사역인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으로 바로 알지 못하면 즉 표적인 몽학 선생의 옷을 벗지 못하면 영원히 참인 복음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로 알고 이어질 불가능에 도전하는 바울의 활약상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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