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패스라 2012. 2. 28. 09:45

오늘 묵상하는 마태복음271~10절 말씀 중에서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충격적인 감동임을 잘 알아 감사하므로 소유하여 누리는 천국의 증인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진다.

 

따라서 먼저 어제 큐티를 다시 정리해보면 복음의 완성을 위하여 그냥 당신의 길을 가려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는 것은 가룟 유다를 당신을 파는 죄인으로 확증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 당신 사역의 완성의 때가 다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보여준 그림도 공권력의 주체들이 가룟 유다로부터 참고인 진술로 들은 예수님의 일상인 복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룟 유다와 함께 당사자인 예수를 연행하여 시시비비를 바르게 가리려고

 

경찰을 보낸 것 같은 당연한 일상을 그들이 구하는 표적을 위하여 가룟 유다를 죄인으로 만들고 예수를 대단한 종교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각색하여 기록한 것일 뿐 아니라

 

그 과정을 보여주시는 그림도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을 위하여 선생의 체포를 막으려는 당연한 몸부림에 또 의미를 부여하고 구약인 묵시와 억지로 일치시키므로 예수님을 대단한 종교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각색하여 기록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심의의 과정을 보여준 그림도 예수님을 비롯하여 공권력을 가진 그들이나 택한 그들이나 증인으로 등장한 그들이나 모두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일어난 사건 자체가 종교로 복음을 이해하려는 불가능의 도전이기에 침묵하신 것임에도 도덕천을 따른 선악의 잣대로 다시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미혹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공권력을 가진 그들이 자신들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소문의 진위를 바르게 가리기 위한 당연한 물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하시는 것은

 

표적을 구하고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하지만 당신의 삶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에 하신 말씀을

 

오히려 자신들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복음과 상관없는 심판을 선포하는 말을 자신들의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미혹하여 기록한 내용은

 

당연히 기존의 종교를 무시하는 신성 모독이 되기에 기록된 것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를 악한 행동인 것처럼 또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의 서막처럼 기록한 것은 그들이 구하는 표적인 종교를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명분을 위하여 외모로 판단한 것이기에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도 절대로 온전하게 깨달아 이해할 수 없기에 공권력을 행사하는 그들이 죄인이나 살인자가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걸어가신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역인 복음은 피조물의 어떠한 수고나 노력을 비롯하여 재물인 희생양이  절대로 필요치 않기에 어떤 누구도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그 자체로 온전한 것임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 후 심히 통곡을 하는 그림을 보더라도 가룟 유다만 정말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라 표적을 구하고 있는 택한 그들의 행위는 모두 같은 것으로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의 잣대로 보면 가룟 유다나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몽학 선생을 따라 최선을 다한 것임에도 

 

이를 미혹하여 도덕천을 따른 선악의 잣대로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자신들의 행위의 결과로 가룟 유다는 자살하고,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는 것처럼 구하고 있는 표적인 종교의 실체는 언제나 신기루인 허상으로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보여주시는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는 그림은 복음과 종교의 한계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신 길이지 도덕천의 잣대로 보면 그 당시 누구보다 당당한 공권력을 가진 그들의 불의와 불법이 아님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는 그림도

 

오직 마태만 기록하고 있음에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도록 예수님 앞에서 사탄이 들어가고 예수님까지 빙자하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한 쇼가 사실처럼 지금까지 우리들을 미혹하고 있지만

 

가룟 유다의 행위를 도덕천의 잣대로 보면 택한 그들 중 제일 똑똑한 그가 앞장사서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여 들어 결국 선생님을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신성모독의 죄인이 되자 스스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는 대단히 용기 있는 모습이지만

 

이것도 복음의 무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당신 스스로 가신 길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구하고 있는 표적인 도덕천의 잣대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는 그림은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현실의 사건과 구약을 일치시킴으로 자신의 행위나 종교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소망인 참이고 진리인 영생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위하여 철학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는 것이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하였고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사라질 신기루인 헛되고 헛된 허상일 뿐 아니라 영생과 천국은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의 도전이라고 하시며

 

그러나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기 보다 보여주시는 모든 도구인 몽학 선생을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를 함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잔을 비우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빈 잔에 영생과 천국을 알 수 있는 성령을 채워줄 뿐 아니라 영생의 실체인 진리와 생명이 되는 길인 복음으로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복음이 되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채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잔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거나 또는 반대이거나 어떤 모양이고 조건이든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피조물의 잔은 신기루인 헛된 것으로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불가능의 도전임을 깨닫도록

 

주신 지혜인 선악과인 몽학 선생으로 바로 깨달아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잔을 가득 채우는 표적으로 삼아 정답을 찾기 위하여 원죄라고 정의하여 에덴 동산에서 퇴출된 후 스스로 영생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를 생산하여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대신에 도덕천을 하나님으로 부르며

 

몽학 선생으로 표적을 구하므로 그것이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며 복음을 가리고 있기에 표적을 구하는 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표적이란 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잔을 채우려고 하는 모든 것으로 우상이나 음란을 악한 것을 비롯하여 갈5장의 성령의 열매나,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요일2장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것이 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한편으로 몽학 선생이 되어 복음으로 가르치는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종교란 자신의 잔을 채우는 표적으로 도덕천을 구하는 것으로 그 외모는 참으로 멋이고 대단하여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야 하는 올바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뿐 아니라 신기루인 헛된 길임을 베드로의 통곡이나 가룟 유다의 자살 등으로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구약은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생을 얻는 길을 주겠다는 것임에도 이를 바로 깨닫기보다 피조물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라 자신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발악함으로 오히려 스스로 그 사실을 반증하게 되었고

 

회개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움이 절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잔을 완전히 비우므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도덕천을 따라 잘못된 것만 비우는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이란 회개함으로 자신의 잔을 완전히 비우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님으로 그 빈 잔을 가득 채우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겠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피조물의 잔을 가득 채우신 성령님께서 피조물 스스로 진리와 생명인 영생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게 함으로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고

 

신약이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으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이고

 

서로 사랑함이란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살아있는 길로 가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증인이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을 받아 신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표적을 구하기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를 도와줄 뿐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생인 진리와 천국을 알게 하고 또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영으로 이를 요한복음16장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 준다고 기록하고 있고 성령 훼방이란 증인의 삶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기보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천국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피조물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그 영생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몸이 말하는 것으로 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구약의 묵시를 따른 십자가의 사건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있던 없던 어떤 방법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인자로 오신 예수가 손가락이 되어 가르치는 복음의 예수인 성령님이 오시면 완성될 뿐 아니라

 

피조물의 어떠한 수고나 노력을 비롯하여 재물인 희생양이 절대로 필요치 않기에 어떤 누구도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그 자체로 온전한 것임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몽학 선생이 되어 한편으로는 복음으로 안내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게 하는 율법을 비롯하여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삼위 일체, 십자가, 성찬, 세례, 동정녀, 성령잉태, 원죄, 기도, 예배, 도덕천 등을 비롯하여 이제는 오히려 복음을 가로막는 표적이 되는 몽학 선생의 옷을 한 겹씩 벗으며 온전하게 모두 벗는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 표적을 구하기보다 몽학 선생인 표적의 옷을 다 벗는 천국을 소망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