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히브리서 7장1~28절 말씀 중에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면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받아 복음으로 복음이 되므로 신기루 피조물에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아깝거나 후회하기보다 너무나 감사한 절대 불가능의 과정을 통과한 충격적인 변화요 감동임을 잘 알아
그렇게 됨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이성과 감성의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확인하고 신나게 누리는 행복한 삶을 위하여 서로 발을 씻기며 서로 사랑하는 구원받은 천국증인들이 어떻게 신기루인 이세상을 살아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이미 묵상한 것처럼 복음의 무지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기보다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생을 소유하기 위하여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며 스스로 예수의 종이 되어 여호와로 착각한 도덕천과 표적인 예수의 은혜에 복과 평강을 비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가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이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주겠다는 신기루 평안인 불안과 구속임에도 복음의 무지로 복으로 착각하여 스스로를 속이며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표적을 구하게 함으로 초대 이단인 초대 교회가 되어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에 걸림돌이 되는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려고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결국 온전한 복음을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고 어제 묵상을 다시 정리해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린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여 이단이 된다는 것이고, 회개의 본질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임에도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으로 미혹하여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여호와의 사역인 복음이 아니라 여호와로 착각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구하고 있는 표적에 대한 신뢰인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결국 주장하고 있는 세례들이나, 안수, 부활, 심판은 표적을 구하는 종교의 도구인 의식이지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에도 불구하고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참인 본질처럼 미혹하여 강요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함으로 결국 구원의 주체는 그것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으로 이는 그것을 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허락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됨으로 스스로 온전해 지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짓으로 오히려 이단이 됨으로 바로 알 때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는 그림은
바울 스스로 환상과 착각에 빠져 표적을 구하는 대단한 종교인 되어 자유를 누리기 보다 불안해 하는 모습에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여 미혹하는 것으로 일곱 번에 칠 십 번까지 용서하라는 하나님이 당신을 두 번 못박는다고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는 주장은 참으로 웃기고 황당한 주장으로 결국 말하는 하나님은 공의와 평등의 여호와가 아니라 너무나 부족한 신기루 도덕천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고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그림도 복음의 무지로 표적을 구하기 위하여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의 잣대로 심판을 빙자하여 복과 저주의 억지 논리로 위협하고 협박하는 참담한 불의와 불법이기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는 그림처럼
스스로 대단한 선생인 심판자가 되어 자신들이 구하고 이는 표적인 종교가 정답처럼 실제로는 불의하지만 불의하지 않음으로 착각한 나의 하나님인 도덕천을 빙자하여 온전한 복음에 똥칠을 하여 미혹하는 것이고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는 그림은 복음과 무관한 자신들의 야망과 욕망을 따라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표적을 구하는 이단인 자신들의 종교를 위한 자신들의 바램으로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하지만
그림에서 말하는 약속인 복은 여호와의 뜻인 복음이 아니라 신기루인 이 세상을 위한 신기루 복으로 결국 약속의 주체가 여호와가 아니라 이성을 따라 스스로 구원을 이룸에 방해가 되는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만든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임에도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여 여호와로 착각하여 미혹하며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이성적인 맹세의 명분으로 맹세를 한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을 여호와로 미혹하여 믿음을 강요함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따라 자신들이 말하는 표적만을 구하도록 미혹하여 강요하기 위하여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는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이성적으로 보면 여호와로 착각한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의 약속과 명세로 대단한 명분을 세워 복음의 증인인 예수를 표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착각하여 미혹하고 있지만
이는 온전함을 모르는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이성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명세가 너무나 대단한 것으로 절대적인 효력을 담보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말하는 하나님이 온전하신 여호와이시면 약속과 명세를 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결국 약속과 명세를 했다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온전하신 여호와가 아니라 절대 온전할 수 없는 신기루 도덕천인 나의 하나님이기에 이런 주장은 온전한 복음으로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복음이 아니라 이단의 교본이 되고 있음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보여주시는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는 그림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는 창세기 14장 18~20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복음의 무지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고 기록한 이 말부터 온전하신 여호와와 상관없이 스스로 만든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을 따라 스스로 만든 제사장으로 바로 알 때
2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는 그림은 떡과 포주를 준비하여 환영 나온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소돔 왕에게 돌려준 것처럼 전리품의 일부를 답례로 준 것을 십분의 일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그림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 말이 사실이면 율법에 따른 십일조의 본질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 아니기에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미혹하여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말하는 것은 율법에도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복음과도 전혀 무관한 불의와 불법의 똥칠로 이단의 모습이고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는 그림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기보다 복음을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복음의 무지로 피조물의 구원을 의롭게 됨으로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화평을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여 이를 사실로 미혹하기 위하여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는 그림은 정보의 부제로 갑자기 등장한 살렘 왕 멜기세덱을 곰이 웅녀가 된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신비를 부여하여 미혹할 뿐 아니라 부모가 분명한 예수의 출생도 억지로 신비를 부여하여
결국 자신들이 만든 나의 하나님인 신기루 도덕천을 따라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만든 죄를 극복하는 도구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복음의 증인을 예수를 제사장으로 삼아 표적으로 구하기 위한 불의와 불법으로 이의 명분을 위하여 4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는 그림처럼 멜기세덱을 빙자하여 억지로 제사장 예수의 권위를 확보하고
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는 그림처럼 제사장 직분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여 높은 자라고 표현할 뿐 아니라
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는 그림처럼 레위 제사장들은 죽을 자들이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다른 따른 제사장은 산다고 증거를 얻는 구원받은 자란 복음의 무지로 참담한 헛소리를 하며
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는 그림처럼 멜기세덱은 결과적으로 레위의 제사장에게도 십일조를 받았으므로 결국 레위 제사장보다 더 높은 온전한 제사장이라고 미혹하여
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는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예수가 대제상이 되어야 함의 당위성을 이성적을 잘 설명하여 미혹한 후
12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라는 그림은 복음의 무지로 도덕으로 출발하여 그 끝이 비도덕적이 되는 신기루 도덕천의 한계를 따라 참담한 헛소리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줄 모르고
13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는 그림처럼 스스로 북치고 나팔 불며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미혹하며
16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는 그림처럼 스스로 공의와 신실하신 하나님이란 자신들이 토한 음식을 다시 주워 먹으로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속성을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을 부정하며
20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는 그림처럼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자신의 치부를 이미 신기루로 변한 그림자 옷인 구약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어
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는 그림처럼 복음의 무지로 신기로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새로운 제안을 함으로 이단이 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23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고 할 뿐 아니라
27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고 신기로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사람들이 용을 그리듯이 복음을 진짜처럼 그려 미혹하고 있지만
이는 복음의 무지와 온전한 여호와를 알지 못한 무지로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어도 스스로 율법을 바꾸며 제사장도 바꾸는 등 그들 스스로 주장한 공의와 신실함의 하나님 속성에 문제가 되므로 스스로 멘붕에 빠져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일 뿐 아니라
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임이 된 새로운 피조물로 제사장이니 거룩함이니 악이니 더러움이 의인이니 죄인이니 하는 신기로 도덕천의 경지를 넘어선 피조물로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온전한 경지로 변화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소망인 참이고 진리인 영생과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위하여 철학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이요 원본인 이데아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했으며 또 모든 종교는 그 원본인 이데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방법으로 만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사라질 신기루인 헛되고 헛된 신기루 허상일 뿐 아니라 영생과 천국은 우리 피조물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피조물 스스로는 그 자체를 알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라고 하시며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달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복음의 최고 몽학 선생이요 증인인 그리스도 예수를 비롯하여 모든 도구인 몽학 선생을 통하여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이를 인정하는 회개인 자기를 부인함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잔을 비우면
여호와께서 그렇게 회개함으로 빈 우리의 잔에 영생과 천국을 깨달아 소유할 수 있는 성령을 채워주실 뿐 아니라 영생의 실체인 진리와 생명이 되는 복음으로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복음이 되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고 하시며
이를 위하여 우리 피조물이 해야 할 것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채운 너무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랑스런 자신의 잔이나 반대로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한 자신의 잔을 비롯하여 어떤 모양이고 조건이든지 신기루인 이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피조물의 잔은 신기루인 헛된 것으로 이를 비우는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도록 주신 자유의지와 지혜인 선악과 즉 몽학 선생으로 바로 깨달아 회개를 하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잔에 찬 것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잔을 채우는 정답을 찾기 위하여 발악한 그 자체를 원죄라고 엉터리 정의를 할 뿐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퇴출된 후 자유의지를 따라 스스로 영생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대신에 도덕천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몽학 선생을 표적으로 구하므로 그것이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며 복음을 가리고 있기에 표적을 구하는 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생각임으로 바로 알 때
표적은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잔을 채우려고 하는 모든 것으로 우상이나 음란이나 악한 것을 비롯하여 갈5장의 성령의 열매나,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요일2장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는 것이 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한편으로 몽학 선생이 되어 복음으로 가르치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양면성이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종교란 자신의 잔을 채우는 표적으로 도덕천을 구하는 것으로 그 외모는 참으로 멋이고 대단하여 사람으로써 마땅히 가야 하는 올바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일 뿐 아니라 신기루인 헛된 길임을 온 성경을 비롯하여 베드로의 통곡이나 가룟 유다의 자살 등으로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구약은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의 잔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생을 얻는 길을 주겠다는 것임에도 이를 바로 깨닫기보다 피조물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라 자신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몽학 선생으로 표적을 구하며 발악함으로 오히려 피조물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의 도전임을 스스로 반증하게 되었고
회개란 구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령님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달아 스스로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움이 절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잔을 완전히 비우므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도덕천을 따라 잘못된 것만 비우는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이란 회개함으로 자신의 잔을 완전히 비우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인 살아있는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님으로도 표현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그 빈 잔을 가득 채우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겠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피조물의 잔을 가득 채우신 그 무엇인 성령님께서 피조물 스스로 진리와 생명인 영생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게 함으로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 이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안을 선물로 받는다
신약이란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누리므로 타인에게 예수처럼 복음의 증인과 몽학 선생이 되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이고
서로 사랑함이란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는 고전13장의 사랑이나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살아있는 길로 가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증인이란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는 구원을 받아 신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까지 이 세상에서 표적을 구하기보다 서로 사랑하므로 타인에게 선생이 아니라 몽학 선생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회개를 도와 줄뿐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생인 진리와 천국을 알게 하고 또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영으로 이를 요한복음16장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 준다고 기록하고 있고 성령 훼방이란 증인의 삶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기 보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다.
천국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피조물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그 영생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복음은 구약의 묵시를 따른 십자가의 사건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처럼 온전함 그 자체이기에 십자가 사건이 있던 없던 어떤 방법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예수가 복음의 증인과 몽학 선생이 되어 가르치는 그 무엇으로만 가능하기에
피조물로서는 도무지 알 수도 표현할 수 없는 없을 뿐 아니라 피조물의 어떠한 수고나 노력을 비롯하여 재물인 희생양이 절대로 필요치 않기에 어떤 누구도 죄인으로 만들거나 분별하지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것임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하고
또 복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죄 사함의 회개에 합당한 도덕천을 따른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므로 복음으로 복음인 된 새로운 피조물이 하는 일인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당한 일이 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지금까지 몽학 선생이 되어 한편으로는 복음으로 안내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게 하는 예수를 비롯하여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삼위 일체, 율법, 십자가, 성찬, 세례, 동정녀, 성령잉태, 원죄, 기도, 예배, 제자, 찬양 등을 비롯하여
복음을 가로막는 표적이 되는 몽학 선생의 옷을 한 겹씩 모두 벗는 천국을 소망하므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태산같이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 표적을 구하므로 성령훼방을 하기보다 서로 사랑함으로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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