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을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4복음서를 바탕으로 십자가 사건을 정리를 해 보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이 세상이 요구하는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조금만 반항하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끝까지 맞서기보다 순종을 하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는 그림이나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는 그림처럼
비웃음과 희롱과 육체의 고통으로 힘들고 목말라 하면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순종을 하다가 또 한편으로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반항을 하면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영혼이 떠나 갔다는 그림을 두고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부분은 회개만 하고 외모로 판단하여 선생이 되지 말라는 예수의 부탁이든 명령이든 그 예수의 말에 반하여 우상인 표적을 구하는 종교를 만들므로 스스로 대단한 선생이나 부모가 되는 이 세상이나 복음에 무지한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참인 것처럼 주장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피조물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를 통하여 피조물의 몸을 입고, 피조물의 죄를 대신지고 그 죄값을 죽음으로 온전하게 지불함으로 모든 피조물이 깨끗하게 될 뿐 아니라 부활함으로 사망을 권세를 깨고 이김으로 승리한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진짜 여호와의 뜻으로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오류와 험이 없다고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초대교회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성경의 그런 주장과는 달리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바로 깨달음으로 예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며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죄를 다 지고 갔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의 기록은 믿음이 없으면 확인이 불가한 것이고
또 가상칠언이라는 내용을 보아도 제1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 24), 제2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23: 43)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 19: 26-27) 는 것은 믿음의 모습이지만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 27: 46, 마가 15: 34). 제5언 내가 목마르다(요한 19: 28) 는 것은 피조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써 스스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으로는 많이 어색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제6언. 다 이루었도다(요한 19: 30) 고 하면서 다시 제7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 46) 라는 것은 참으로 믿음 없이 비겁하고 야비한 겁쟁이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최초의 인간 아담을 구원했으면 될 것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성경의 기록처럼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을 억지로 돌아오기 위하여 스스로 화를 내며 벌을 주었다가 제발 바로 가라고 벌벌 떨면서 쇼를 하는 육신의 부모 같은 못난이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복음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호와의 뜻인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를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로 새로운 피조물 된 예수가 당신의 때가 찰 때까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처럼 회개를 하기보다 표적을 구하고 있는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미혹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으로 결국 엄밀하게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고 또 도마의 주장은 새로운 피조물 예수를 대단한 선생을 착각하여 그 예수가 하는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현상인 외모에 집착하기보다 목적인 표적을 위하여 무소유 등 외모인 이 세상의 것을 억지로 가볍게 여기므로 불교의 최고 경지 수준인 해탈의 여여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그 외모는 회개를 말하는 우리의 주장과 비슷하지만
깨달음은 목적인 표적을 위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탈, 무소유 등으로 여여 하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위하여 발악한다는 것이고 우리의 주장은 회개함으로 내가 없으니 스스로의 노력 없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여여하게 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예수의 십자가 그림은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예수를 공평 타당함의 논리인 외모로 판단하여 신기루인 바람을 잡기 위하여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하므로 선과 악으로 승패를 가리려고 하는 그들을 논리에 대하여
새로운 피조물 예수는 참이요 정답인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을 설명할 수 없자 법이나 공권력처럼 힘으로 밀어 부치는 그들과 정면 대립하여 맞서기보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는 것처럼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항변해도 도무지 알아 들으려고 하지 않자
힘들고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걸 일이 아니기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또 한편으로 그로 인한 고통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착각하고 있는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 예수가 감당해야 할 사역인 이 땅에서의 삶이 완성되어 영생불멸을 소유한 온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여호와의 뜻인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를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이 어떻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더욱더 분명해 질 것이다.
그래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1994년 정도부터 개인 사업을 해 왔다. 부과세와 종합 소득세를 신고를 세무서를 직접 방문하여 해오다 97년도부터 인가 홈텍스로 세무서 방문 없이 신고가 가능하다고 하여 나의 편의를 위하여 이용하였는데
97년 2기분 부과세 신고 때 전산 오류가 발생했다 이전처럼 정상으로 입력하자 엄청난 세금이 나와 제목을 보니 매출세액으로 되어있어 매출 금액이 아니라 세액으로 입력하자 결과는 정상적인 부과세가 나왔다. 그래서 98년도 1기분 부과세도 그런 식으로 입력을 하였다.
그런데 2009년 3월 도봉세무서로부터 종합 소득세에 문제가 있다고 공문서가 날아와 종로 세무서에서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그렇게 입력이 되면 마이너스 부과세가 떠야 하는 등 전산에서 오류 경고가 떠야 하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나의 고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수기로 수정 신고를 한 후
종로와 도봉 세무 담당자가 서로 통화도 하고, 내가 직접 도봉 세무 당당자를 만나 정황을 설명하고 확인한 후 부과될 소득세가 없다며 처리가 완료되었다고 하여 지내던 중 2013년 담당자가 바뀐 도봉 세무서에서 이전에 담당자와 똑 같은 문제로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때의 처리가 완료되었다는 정황을 설명하자 이해는 되지만 미처리 건으로 남아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 일년 매출이익 이천 만원 정도에 17%의 세금과 벌금을 합하여 4백 정도 2년에 약 7백 정도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찾아갔다 세금 행정은 모르지만 어떻게 같은 대한민국에 같은 세무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한 사람은 부과될 세금이 없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일년 매출2천 만원에 4백 만원의 세금이 부과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냐,
또 착오가 난 것도 고의가 아니라 세무서에서 공급한 프로그램의 문제였지 고의나 사기도 아니고 또 불로 소득으로 번 것도 아니고 또 지금까지 미처리 된 것도 나는 그때 세무 담당 공원의 말을 믿고 또 이후의 아무런 행정적인 문제가 없었기에 있었으니 세무 행정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나 고의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99년도에 이미 부과세도 수정 신고를 하지 않았냐고 항의하자
정황은 이해 되고 미안하지만 처리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제시하는 방법이 내가 부담해야 하는 세금과 벌금의 일부를 나와 거래한 다른 사람을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면 분산해 주겠다는 것으로
결국 정의의 여신처럼 공평과 정의의 이름으로 힘인 칼을 든 정부는 공평과 정의인 사실관계보다 공권력인 힘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처럼 연루된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것이기에
그렇게 힘들어 하며 잔을 옮겨 달라고 하던 나에게 “예수는 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을까?”라는 우리 조각바람 식구의 문자에 정신을 차리고 세무 담당 공무원 스스로 이해되고 미안하다는 것처럼 좀더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기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한 것처럼 미안하여 결국 또 다른 죄인을 만들어 나의 무게를 좀 들어주겠다는 이상한 배례를 사양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세무회계사를 찾아가든지 공권력에 항의하여 나의 돈을 위하여 내가 생각하는 공평 타당함의 정의를 찾고 싶지만 거듭하여 마음을 다져본다.
우리 식구가 문자로 말해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또 평상시 아들을 비롯하여 주변에 강조한 것처럼 만약 내가 의문사로 죽더라도 그것을 밝히려고 너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또 가능하면 이 잔을 옮겨 달라는 예수의 고백처럼 피조물의 목숨이 참으로 아깝고 억울해도 참을 위하여 또 신기루이기에 당신의 목숨을 버린 것처럼 7백만원의 돈이 참으로 아깝고 억울해도 이 역시 신기루이기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처럼 세상이 원하는 대로 두고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처럼 나도 예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의 삶을 다 이루기 위하여
이번에는 7백 만원이지만 이 세상이 원하면 피조물인 나의 목숨까지도 신기루이기에 아낌 없이 주어야 함의 실상을 정답이 없는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면 참으로 억울하고 분이여 목이 마르는 고통임을 확인하는 멋진 시간과 기회로 바로 보고나니 이제야 긴 숨이 제대로 운행되는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생각난다.
씨름 선수였던 큰 아들이 고등 학생일 때 친구 뺨을 딱 한대 때렸는데 그만 고막이 나가 합의금 5백 만원을 아주 깨끗하게 지불 했는데 그 때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여 결국 그렇게 쪼잔 한 하나님의 뜻에 깨끗하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나의 신앙심의 척도로 자랑이 되어 결국 이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자유와 행복을 제대로 맛보는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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