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알고 있는 구약에서 요구하는 사랑은 어쩌면 신약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몽학 선생으로 껍질인 것처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순결에도 똑 같은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와 원인을 알기 위해서 사랑이나 순결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묵상해보면 너무나 분명해 진다.
사랑도 순결도 온전한 생명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우리의 자랑이나 과시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사랑이나 순결의 이름으로 오히려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믿고 인정하고 있는 결혼과 부부를 두고 생각해 보자
결혼이나 부부관계에 있어 필수가 바로 사랑과 순결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과 순결로 결혼이나 부부관계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사랑과 순결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든 투쟁으로 발악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깊은 속내를 들어다 보면 어느 누가 감히 만족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는 곧 다시 말하여 우리들이 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사랑과 순결의 본질이 아니라 껍질을 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구약의 사랑과 순결은 내면의 생명과는 상관없이 일단 외형이 법과 제도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면 족하지만
신약의 사랑과 순결은 외형인 법과 제도보다 서로 생명력의 존재로 판단하는 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인 율법이나 기타 종교의 공통점으로 외형인 지키는 것이 진리로 고착된 사랑과 순결에 대한 고정관념의 벽인 주례 때 이 결혼은 하나님께서 맺어 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비롯하여
부부 상호간에 절대 불가능일 수 있는 신약에서 명령한 “서로 사랑하라” 를 위하여 사랑과 순결을 요구하거나 도전하면서 끝까지 가면으로 속을 감추고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하거나, 도중에 폭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에 앞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서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이 나의 반쪽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을 독점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이 하는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자신이 하는 것이 됨으로 오히려 더 즐겁고 신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우리들의 편의에 따라 임으로 만든 어떠한 틀이나 재도를 도입하면 그 사랑은 곧 죽어 버리고 껍질만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결도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서로 온전히 공유하는 것이 순결이 되어야 신약에서 말하는 사랑과 순결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 명령에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 지체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