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이 바로 선 시대나 붕괴된 시대에도
우리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로 온전하고 완전한 처방전인 바른 구원의 살아있는 길을 찾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음을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퇴출된 후 긴 시간을 통한 수많은 도전으로 결국 피조물 스스로는 절대 불가능함을 자유의지로 항복을 선언하자
이에 여호와께서 우리 피조물에게 허락해주신 온전하고 완벽한 살아있는 처방전인 복음으로 회개하고 복음이 되기보다 오히려 그 복음을 빙자하여 피조물 스스로 다시 그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똥칠로 이 세상은 점점 더 빨리 혼돈과 혼란의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때
성경을 통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온전한 구원의 처방전인 복음을 위하여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복음에 무지한 바울의 주장대로 다른 종교가 헛된 것이면 바울 자신이 말하는 종교인 기독교도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함에도 자신의 종교만 참인 것처럼 착각하여 회개보다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허황된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온전하신 복음에 똥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데
그것은 바울처럼 똑똑한 사람들인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와 정치인들이 이 세상의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피조물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면 할수록 문명 발전의 기대와는 반대로 각자의 삶이 점점 더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해 진다는 사실을 우리 현실의 삶으로 반증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결국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하여 문명 발전을 거부하거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바울같은 종교인이나 정치인들처럼 정면으로 맞서 스스로 답을 찾는 불가능에 도전하기 위하여 외모로 보면 대단한 논리를 펼치는 선생이 되어 온전한 복음에 똥칠을 하므로 본인은 물로 타인까지 실족하게 하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기보다
성경을 통하여 피조물이 한 고백을 인정하는 회개로 자신을 부인함으로 결국 죽은 시체가 된 눈에 보이는 자신을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여호와께서 정한 년 수인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자신의 시체를 십자가처럼 지고 가는 것이
마태, 마가, 누가를 통하여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것으로 이론은 진짜 십자가인 자신을 지고 가는 것처럼 힘들 것 같지만 그 본질은 자신을 부인함으로 허상이 된 것이기에 힘들기보다 결국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새로운 피조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누리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도 마태, 마가, 누가를 통하여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는 것으로
그 본질은 나와 상관없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려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됨으로 이제는 떨어지면 죽음이기에 살기 위하여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학이나 문명이나 종교나 정치가 발달하면 할수록 기대와는 달리 세상이 점점 더 혼란과 혼돈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혼란과 혼돈 그 자체였지만 이전에는 우리의 무지로 인하여 누릴수 있었던 시한부 평안으로 바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도덕천을 따라 외모로 판단하여 부부나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는 나를 참 나로 인식하여 달려왔기에 그 나를 위하여 조상 섬김과 부모에 대한 효 그리고 대를 잇기 위하여 자녀에게 올인 하는 것으로 나의 정체상에 의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만일 의심을 가지고 확인 하려고 도전하면 이 세상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막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이전에는 그래도 서로에게 공존하는 유익한 부분이 있었기에 지속할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지식과 정보가 보편화된 시대에는 그것을 억지로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흑과 백처럼 유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과 불이익이 함께 드러나기에 미디어 상에서도 부부를 가족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이에 걸 맞는 서로의 역할을 다시 분명하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절대 불가능의 잘 못된 명제에 도전하기 위하여 도덕천을 따라 발악하며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진짜 내가 아니라 거울에 비취는 나를 찾기 위하여 허공을 잡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인 불의와 불법인 똥칠을 멈추고
이 세상의 변화와 존재 유무에 관계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영생을 소유한 나를 찾아 누리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복음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 즉 행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기 위하여 이웃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가 합하여 하나가 되듯이 하나가 되는 복을 받아 서로 사랑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여호와의 분명한 뜻으로 이를 위하여 복음을 주셨고 또 우리 피조물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이요 사명임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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