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복음
불교란 붓다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나는 중도를 정등각 했다”고 함으로 시작되었으니 결국 불교의 본질은 중도를 바로 깨달았다는 것으로 그 핵심은 중도가 되고 또 “중도가 팔정도라고 함으로 결국 팔정도를 깨친 것이 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정도를 깨침으로 중도를 깨친 것이 아니라 중도를 정등각 하니 팔정도가 자연스럽게 깨쳐졌다는 것으로 바로 알지 않으면 유교와 분별이 곤란해 짐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중도는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기 위한 유교의 중용이나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기독교처럼 선과 악, 음과 양, 시와 비등의 양변의 경계선인 중앙으로 가려고 발악하거나 또는 선한 한쪽만을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모두 버리므로 오히려 양변이 서로 하나가 되어 소통을 한다는 것으로 결국 양변을 모두 취한다고 하나의 바다인 일해 라고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의 논리가 다른 종교보다 크고 깊게 보여 스스로 대자 대비 하다고 하는 것처럼 그 외모는 복음과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표적이나 그 주장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온 세상 모두가 되어야 불교의 주장대로 지금 여기가 천국이 되고 자신도 부처가 되기에 종교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도를 전하기 위한 전도에 목을 메는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따르는 사람이 소수이면 그 주장만 공허한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영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주장이 될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개나 소나 더불어 잘 사는 공평한 세상을 아무리 큰 소리로 주장해도 그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이론인 공염불만 될 뿐이다.
따라서 예수가 표적을 구하지 말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바로 종교 행위를 금한 것이고, 종교인들이 주장하는 중도나 중용이 바로 회개를 외모로 판단한 것으로 바로 알아야 중도나 중용을 위한 불가능의 도전으로 종교인 끼리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며 발악을 하기보다 나를 부인하는 회개를 함으로 중도든지 중용이든지 그 자체의 의미가 사라질 뿐 아니라
따르는 자가 하나 없어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므로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었음을 서로 사랑함으로 직접 확인하고 믿으며 신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 팔정도란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 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방법으로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의 정답 수칙처럼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울리고 있는 아래의 수칙은 정답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이란 하나의 틀을 위하여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명하려는 발악인 불의 불법의 똥칠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1. 상대방에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라 2.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3. 상대방에게 지나친 관섭을 하지 마라 4. 상대방의 요구를 수용하라
5. 상대방에게 덕 볼 생각을 하지 마라
결혼의 의미
용서와 회개
그리고 이사야 1장에 등장한 하나님은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바로서면 그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처럼 희어지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된다고 하시며 당신의 대단한 용서를 과시하시며 회개를 강요하는 것 같고
또 마태복음 18장에서도 형제의 죄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기록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대단한 용서를 강요한다고 미혹하여 신기루인 이 용서의 바람을 잡으려고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용서를 온전하게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복음에 무지한 선생들이 이를 문자적으로 판단하여 미혹함으로 인하여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이미 확인한 것처럼 다른 종교보다 좀더 복음에 가까운 불교를 보더라도 선과 악을 다 버리는 해탈로 선과 악이 서로 하나게 되게 하는 중도를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사야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함으로 이전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결국 현재 상태로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상대방의 죄가 눈이나 양털처럼 되는 온전한 용서가 절대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기에
결국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한 것은 용서의 강요가 아니라 현재 피조물의 상태로는 온전한 용서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 자신들이 이전에 용서해준 사건이 있다면 용서로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져 전혀 기억나지 않는지 아니면 명분이 없어 직접 표현만 아니할 뿐이지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더욱더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는지 각자가 자신을 통하여 점검해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기루인 용서의 바람을 잡으려고 발악하고 있는 모든 종교나 너와 나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는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는 결국 자신들의 자랑이나 상대방의 굴복을 확인하기 위하여 용서를 빙자한 회개를 강요하고 있지만
이는 온전하신 여호와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처럼 종교나 이 세상의 선생들이 말하고 있는 회개와 용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가 아니라 도덕천을 따른 신기루인 세례 요한의 회개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이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가 성령훼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내가 나의 발을 씻기는 심정으로 지적하면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가 아니라 이전 너와 나의 입장에서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발악하거나
또는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동물의 피를 재물로 드릴뿐 아니라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며 몇 일 동안 죽을 상을 하는 성경의 외모처럼 현실의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저 자세가 되어 속으로는 오히려 이빨을 갈며 기회를 엿보기 보다
심한 악취의 더러운 발을 씻겨 줌으로 성령훼방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바로 깨달아 저 자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로 인하여 무례를 하였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한 후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인 바로 우리로 돌아가므로 서로 이전 것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게 되는 것이 온전한 용서이기에 예수께서도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때
용서하고 용서받기 위한 쇼를 위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거나 또는 엉뚱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도토리 키 재기를 하기보다 이미 회개함으로 부인한 너와 나의 환상에서 빨리 깨어나야 온전한 용서가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받은 행복을 신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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