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하는 예배는 신기루 도덕천인 하나님을 표적으로 구하기에 합당한 성경을 바탕으로 기도와 찬송과 헌금과 헌신과 신안고백을 드림으로 표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자신의 만족을 구하자는 것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불공은 우리 인생이 진여 자성의 성불이 되는 길을 제시한 불법을 표적으로 구하기에 합당한 불경을 바탕으로 염불과 찬불과 헌금과 헌신과 절을 비롯하여 향, 등, 꽃, 음식 등 자신을 드림으로 결국 자신의 만족을 구하자는 것으로
그 궁극적인 목표의 표적은 기독교 에서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중도를 정등각 했다는 붓다처럼 깨달음의 붓다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이고 불교는 깨달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기독교는 예배를 강요하고 불교는 불공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욥기28장28절에서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며 성경에서 99번을 강요하고 지혜란 단어를 434번이나 사용하면서 결국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도록 강요하고
불교에서는 진여 자성이니, 불생불멸이니,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정혜쌍수(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선정과 현상 및 본체를 관조하는 지혜를 함께 닦는 일)니. 견성 성불이니, 해탈이니,
만약 그렇게 하여 누구든지 예수나 붓다처럼 되었다면 예배나 불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몽학 선생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 도구로 본질이 아니기에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결국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헛되고 헛된 짓이라고 스스로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종교란 이름으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기보다 종교의 한계 즉 종교와 복음을 분명하게 분별하여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구원받아 표적으로 구하고 있는 예수나 붓다처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므로 종교 행위로는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그것을 채우려고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으로 발악함으로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기보다 받은 복을 신나게 누리는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육강식에 대한 종교의 실상 (0) | 2012.11.24 |
---|---|
성철 스님이 말하는 불교 즉 제법 실상, 일진 법계의 뜻은? (0) | 2012.11.17 |
특별 큐티 (플라톤의 '향연' 사랑에 관하여) (0) | 2012.11.05 |
종교의 한계(종교와 복음, 결혼의 의미, 용서와 회개) (0) | 2012.11.02 |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0) | 2012.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