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향연이란 책에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축복 받은 본성을 알기 위하여 사랑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라고
복음에 무지한 플라톤이 회개하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모르고 사람들이 상상의 용을 그리듯이 복음과 서로 사랑을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대단한 이성으로 그림을 그려 선생이 되자
이에 사람들이 이를 빙자하여 선생이 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Love)는 산크리스트어의 로바(lobha)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분별하고 또 로바는 불교에서 말하는 악(惡)의 3가지 뿌리인 3업 즉 탐(貪, lobha)/탐욕, 진(瞋, dosa)/노여움, 치(癡, moha)/어리석음 중에서 탐욕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후
사랑이라는 말이 탐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은 우연일 수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연금술과 같은 신비한 과정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는데 그것은 탐욕이 부드럽게 풀어져 사랑이 된다고 하여 로바(lobha), 그것은 탐욕이었으나 녹아 내리면 사랑이 된다고 할 뿐 아니라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탐욕은 쌓아 두는 것으로 탐욕은 결코 나눠주려 하지 않고 사랑은 오로지 주려고 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나눔이기에 로바(lobha) 라는 단어가 영어의 러브(Love)가 되기까지는 마법처럼 신비한 이유가 있다고 믿으며
또 내면의 연금술이 적용하지 않는 한 로바는 사랑이 되지 않으므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고 플라톤이 했다고 복음의 무지로 멋대로 판단하여 선생이 될 뿐 아니라
복음의 무지로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라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으로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감성을 탐욕으로 착각하여 불의와 불법으로 똥칠인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미혹한 후
탐욕의 유사어 갈애(taṅha), 욕망(rāga), 감각적 욕망(kāma) 등을 통하여 탐욕은 바라고 원하는 것과, 물질적 세속적 이익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것을 비롯하여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미묘한 형태의 탐욕으로 정의하고
또 탐욕의 기능은 대상을 붙잡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대상을 얻지 못하면 쉽게 분노(dosa)로 변하므로 결국 탐욕은 모든 해로운 업의 원인이 된다고 할 뿐 아니라
불교의 기초교리에서도 탐욕은 바램, 소원, 소망, 바램, 꿈, 희망, 욕망, 욕구, 등의 나쁜 마음으로 표현하여 결국 탐욕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교는 신기루 외모인 도덕천을 따른 이성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자유의지인 감성을 소멸하기 위하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발악임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바라고 원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 탐욕에 해당하지만, 열반을 원하거나,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원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기 위해 돈을 원하는 것이나, 종교 단체에 헌금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편의나 유익을 따라 멋대로 좋은 탐욕과 나쁜 탐욕으로 억지 분별을 할 뿐 아니라
이런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스스로 분별한 좋은 탐욕을 열의라고 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아비담마에서 탐욕을 원숭이는 끈끈이에 한 손이 붙으면 다른 한 손으로 떼어내려다가 두 손 모두 끈끈이에 달라붙고, 입으로 물어 떼어내려다 입마저 달라붙고, 두 발로 밀쳐내려다 두 발마저 달라붙는다고 한다. 이렇게 머리로는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달라붙는 끈끈이처럼
탐욕은 대상이 다가오면 강하게 붙잡으려고 하고 또 달구어진 냄비에 고기가 달라붙듯이 대상에 달라붙으며 옷에 기름이 묻으면 깨끗이 제거하기 어렵듯이 대상에 한 번 집착하면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탐욕의 견해가 잘못되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할뿐 아니라
빨리어에도 탐욕과 관련된 뻬마(pema), 탄하(tanha), 라가(raga), 까마(kama) 등의 용어가 있는데 뻬마는 가족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애욕 또는 애정을 말하고 애정이나 애욕은 족쇄가 되기도 하여 한 번 엮이면 벗어나기 힘들게 상대방을 속박한다고 하고
배고픔, 갈증과 같이 좀 강한 욕구를 갈애(딴하, tanha)라고 하며 원초적 욕망 중에 가장 강하고 질긴 것이 성욕으로 성욕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욕망(라가, raga)이라고 부르며
라가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탐욕은 크던 작던 간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며, 탐욕이 크면 괴로움도 크고, 탐욕이 작으면 괴로움도 작으며 탐욕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할 뿐 아니라
탐욕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은 송아지가 자라면 뿔도 자라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탐욕도 점점 커지며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탐욕이 뭔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유욕과 집착이 커져간다고 피조물의 자유의지인 감성을 모르는 참으로 참담한 헛소리를 용감하게 하며
소금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것과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고 충족하면 할수록 탐욕이 더 심해져 가기에 결국 탐욕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윤회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고 복음에 무지로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똥칠을 할 뿐 아니라
아무리 작은 조약돌이라도 물에 던지면 가라앉듯이, 아무리 작은 탐욕이라도 악처에 태어나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법구경 240번 가사에 대한 집착으로 이가 된 띳사 장로 이야기 참조) 배우자, 자식,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아귀(불행한 귀신)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탐욕이 많더라도 공덕이 있으면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복음에 무지한 참담한 똥칠을 마치 바위를 강물에 던지면 바로 가라앉지만 배 위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고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거와 같다고 미혹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세상의 배가 유한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배로 표현된 공덕도 온전하고 완벽하지 못함을 바로 안다면 플라톤이 <향연>이란 책에서 “사랑이라는 신비를 행하는 사람은 진리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와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축복 받은 본성을 알기 위하여 사랑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다”는 말은
복음에 무지한 플라톤이 자신이 가진 대단한 이성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를 누리는 복음을 외모로 분별한 것으로
만약 플라톤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을 바로 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렇게 갈망하던 이데아가 되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며 감동할 것이지 생각하며 더 열심히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받은 복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되어야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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