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다는 공(空)과 없다는 무(無)로 사전에 기록된 의미를 따라 필요에 따라 같은 뜻으로 또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무소유의 삶을 제법 실상이 공함을 깨달은 최고 경지의 삶으로 인식하여 종교나 이세상의 수많은 선생들이 피조물로서는 이론만 가능하지 온전한 공이나 무가 되는 것이 절대 불가능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여 무소유의 삶에 도전하여 이룬 것처럼 또는 그것이 참인 진리처럼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이 세상을 미혹하자
복음에 무지한 우리들은 그것을 참으로 착각하고 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말라고 하면서 결국 스스로 분별하여 우리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의 공수래공수거와 인생은 덧없고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의 인생무상 새옹지마가 보통 인생들의 삶의 실상인 것처럼 착각하여
그것으로 각자의 참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자존감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아존중감 즉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을 따라 일어난 신기루처럼 보이는 자존심인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인 신기루같은 바람을 잡기 위하여 발악하거나
또는 반대로 심한 열등감인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의 자책과 포기를 오히려 억지요 엉터리인 신기루를 위로처럼 구하므로 참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신기루인 바람을 잡는 헛되고 헛된 짓인 불가능의 도전으로 허비하고 있지만 공이나 무에 숨어있는 또 다른 비밀인 신비를 바로 안다면 누구나 참인 영생을 소유하여 이 세상이 줄 수 없지만 그래도 모두가 본능적으로 꿈꾸는 평안이 자유와 행복을 소유하여 누릴 수 있을 대단한 지혜로 멋진 도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공과 무를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론뿐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공이나 무와 오히려 꽉 찬 온전함으로 다른 무엇이 들어갈 이유나 틈이 없는 꽉 찬 온전함의 공이나 무가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지나가고 있는 어떤 사건을 부족한 이성이 어느 날 갑자기 붙잡아 분별함으로 서로 의견 출동이 일어나면 각자 자신의 자존심을 따라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 펼칠수록 오히려 점점 더 어렵게 꼬여갈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각자의 자존심에 심각한 손상이 오자
이런 끝없는 갈등과 갈급함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과 무의 이론을 따라 그 사건 자체를 비롯하여 서로 관계의 의미를 지우는 공이나 무를 행하면 그 외모는 조용할 수 있지만 그 중심도 공이나 무가 됨으로 결국 서로의 관계도 공이나 무가 되는 바보 같은 선택을 참인 것처럼 신기루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선택하거나 정답처럼 행하고 있는데
이를 좀더 고차원적으로 표현하면 출가했다고 하거나 또는 무상 무념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이는 결국 이성과 감성을 소멸한 식물인간인 괴물로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일 뿐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온전한 공과 무가 절대 불가능 함으로 결국 괜히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또다른 불안과 갈급함만 더하는 꼴이 될 뿐이고
또 다른 방법인 꽉 찬 온전함의 공과 무의 이론을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깨달은 것처럼 이미 부인한 나이기에 처음부터 자존심은 신기루인 허상으로 없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올바르게 자각하게 되면 문제는 사건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라 바로 신기루인 헛된 자존심을 위하여 바람을 잡으려고 발악하고 있는 서로의 주장 자체가 문제임을 인정함으로(회개함으로)
서로의 승패나 선악이나 의인이나 죄인 됨 없이 서로 승자로 하나가 되면 이것이 바로 꽉 찬 온전한 하나가 된 공이나 무로 그 외모도 조용하지만 그 중심은 온전한 생명인 영생이 꽉 차 역동하는 자유와 행복으로 참 평안인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의 조용함인 것이다.
따라서 공과 무의 의미도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으로 판단한 비어있고 없다는 것으로만 분별하기보다 꽉 찬 온전함의 공과 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로 비어있음과 꽉 차 있음이 하나일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공(空)과 무(無)의 또다른 의미인 신비인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이면 모르겠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가 이미 부인한 신기루인 나를 위하여 지나가고 있는 사건을 괜히 부여잡고 부족한 피조물처럼 이성으로 분별함으로 처음부터 허상이었지만 회개함으로 더욱더 분명해진 신기루처럼 헛되고 헛된 허상의 자존심을 위하여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인하여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을 받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정말 놀라운 기적까지도 단숨에 저버리고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자존심을 잡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욱더 강력하게 펼쳐보지만 펼치면 펼칠수록 점점 더 자존심이 상해질 뿐 아니라 그것이 성령훼방이 되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므로 이미 소유한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인 경고도 분명하게 명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인식도 하기 전에 이전의 습관을 따라 새로운 피조물에서 피조물도 돌아가 자존심 타령을 하는 나를 만나게 되면 빨리 회개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돌아와 버리면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것처럼 조금은 미안하고 우습지만 그래도 꿈처럼 그냥 깨어나면 깨끗하게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면 날마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하루 또 하루를 신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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