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누락이 많아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도 힘든 유다 복음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하여 결국 절대 불가능에 도전한다고 고생들 많이 하셨죠 그러나 그것이 절대 의미 없는 헛수고가 아니라 태초부터 감추인 것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인 복음을 바로 깨달아 소유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멋진 기회요 과정이라면 그런대로 위로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그런 모습은 우리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을 따라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으로 자유와 행복인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불을 향하여 달려드는 불나비처럼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실상인 일그러진 인생사로 바로 깨달아 확인하고 인정하여 회개함으로 사망에서 영생불멸의 길로 갈아 탈수 있는 멋진 기회기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깊이 묵상해보면 어제 보여준 긴 그림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그림은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는 것처럼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피조물의 능력이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사건이기에 창세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것으로 결국 피조물의 구원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비유이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는 비유나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비유를 비롯하여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는 비유나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는 비유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는 비유처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가진 어떠한 능력이나 자랑인 자격이나 조건을 비롯하여 피조물인 자신까지 부인하므로 결국 외모인 공평 타당함으로 판단한 피조물의 모든 것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배제된 상태에서 오직 복음으로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는 신비를 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는 비유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비유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비유나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비유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비유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비유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는 비유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비유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 깨달아 회개를 하기보다 신기루인 바람을 잡기 위하여 불나비처럼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의 대단한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인들을 비롯하여 부모나 자칭 대단한 선생들이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를 따라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그 본질인 이데아로 스스로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발악하고 있는 것처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를 따라 사람들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상상의 용을 그리듯이 착각이나 환상에 빠져 그린 요한 계시록을 해석함으로 이단이라고 하는 종교가 출몰하지만 그것이 정답이 아닌 것처럼 이해는 고사하고 누락이 많아 읽기도 곤란한 유다 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하면 이 역시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아담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현실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고락(苦樂)으로부터 해탈함으로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으로 자유와 행복인 락(樂)만 영원히 누리기 위하여 창세부터 지금까지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 등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의 성공을 복이라며 추구함으로 과학과 기술과 의술 등 문명이 발달하여 수명이 연장되는 등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이 개선되어 그렇게 될 것처럼 보여도
그 실상은 우리들이 원하는 온전한 평안으로 자유와 행복인 락(樂)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고(苦)인 환경과 인성의 파괴로 패륜이나, 불륜이나, 비정의 부모를 비롯하여 각종 흉악하고 흉측한 범죄나, 에이즈, 살인 진드기 신종 플루 등 손을 쓸 수 없는 질병 등이 존재하여 그 락(樂)을 완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 것처럼
결국 부족한 우리 피조물의 힘과 지혜의 능력으로는 고락(苦樂)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하여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는 것은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분명히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은 결코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인 지혜와 능력으로는 절대로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태초부터 감추인 것처럼 보이는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기보다 이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를 따라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이나 우주 만물의 이치를 판단하여 자신들의 생각대로 성경이나 각자의 복음서를 기록하여 이를 정답처럼 경이라 하며 각종 종교를 만들므로 오히려 온전한 복음을 가리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하여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고 할뿐 아니라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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