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유다 복음의 서론

패스라 2013. 5. 20. 08:22

유다 복음서는 최후 만찬으로 유명한 유월절을 전후하여 일어난 가룟 유다가 경험한 예수와의 대화를 비롯하여 공평 타당함의 논리를 따라 유다가 바라본 예수와 자신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 복음서는 기승전결이 거의 온전하여 정경 복음서로 규정한 4복음서나, 복음의 본질을 정경 복음서와 다른 각도로 바라보며 두서없이 뒤죽박죽 된 기록이라 정경에서 밀려 이단 취급을 받고 있는 도마 복음서보다 누락된 부분도 너무 많고, 더 엉성할 뿐 아니라

 

정경 복음서의 핵심 주장으로 험이 없다는 12제자의 정체성과 성찬 등을 부정하고 있기에 정경 복음서로 세뇌된 우리들에게는 도마 복음서보다 더 이단 취급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더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누락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적인 기록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말하는 복음의 본질을 바로 알지도 못했고 또 녹취록도 없는 대화를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그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국 누락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왜곡이나 변질이 적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둘째, 태조부터 감추인 신비로 여호와의 뜻인 온전한 복음은 지금까지 드러난 정경 복음서와 도마복음서 그리고 유다 복음서를 비롯하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구원인 영생불멸 즉 온전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려는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와 목적을 따라 파생된 모든 종교나, 앞으로 다른 복음서가 출몰한다 하더라도 그 모두를 충족시켜 유구무언이 되어야지

 

외모인 세상적인 힘의 논리나 공평 타당함의 논리를 따라 유규무언에서 말한 자동차처럼 도구인 종교나 각자 온전하지 못한 자신의 주장을 탓하기보다 사용자인 피조물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억지로 참거나 이단으로 배척하여 유구무언을 하게 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거나 배부르다고 하면서 더 행복한 것이나 더 맛있는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 말한 행복하거나 배부르다는 주장은 온전함의 논리를 따라 진짜로 충만하여 유구무언 하는 온전함의 행복함이나 배부름이 아니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비교한 결과물로 결국 영원히 행복함과 배부름을 갈망하며 고락을 반복하는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복음의 무지로 복음을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기록한 정경 복음서를 따라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온전한 제물과 온전한 대 제사장이 되려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장을 비롯하여

 

용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비유나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율법이나, 성전이나, 예배나, 성례나, 성찬이나 제자 등 본질처럼 중요하게 착각하고 있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절차 등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니 뜻이니 하면서 세뇌된 부분을 일단 배제하고 외모가 아니라 온전함의 논리인 공의를 따라 판단할 때

 

여호와의 뜻인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인 복음을 바로 깨달아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