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실삶큐티의 엄중경고!!!

패스라 2013. 6. 8. 09:02

일반의 칭찬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칭찬을 했더니 고래를 춤추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고 정답처럼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온 세상을 미혹하여 세뇌하자

 

이를 정답으로 착각하여 긍정의 힘이라고 할 뿐 아니라 웃으면 복이 온다는 코미디를 정답처럼 웃음을 도구로 CS 즉 고객을 만족시키겠다는 불가능의 도전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마케팅이 온 세상을 요동하게 하는 등 많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과연 이 세상은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복을 받아 행복하게 변화 되고 있는가?

 

여기 미친 사람들이 있다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들, 우리 사회의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정해진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에 안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인용하거나, 그들을 부정하거나, 추켜 올리거나, 비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은 대단한 신흥 종교가 일어난 것처럼 센세이션 즉 감각과 지각과 느낌의 감동이나 흥분의 물의를 일으켰지만 결국 그도 세상의 외모만 일부 바꾸었지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세상의 중심은 역시 생로병사의 고락 속에서 신기루 행복이란 바람을 잡으려는 헛되고 헛된 절대 불가능의 도전만 계속되고 있지 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 동산에서 정답인 회개를 하기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나 생명나무 실과로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소유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고 한 아담과 하와의 불가능의 도전처럼

 

정답이 아니라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긍정의 힘과 같은 명분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을 소멸하고 이 세상이 원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세뇌하여 칭찬으로 춤추는 고래 같은 괴물을 만들어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신기루인 행복을 잡기 위하여

 

칭찬 받을 자격이 없거나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힘이란 명분으로 칭찬함으로 춤추는 고래 같은 괴물을 만드는 것은 온전하거나 바르지 못한 자신의 불의와 불법을 선의의 거짓말이란 엉터리 논리의 명분으로 합리화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결국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의 비열하고 비겁한 모습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족한 피조물의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정답이 아닌 명분으로 여호와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을 소멸하고 이 세상이 원하는 이성과 감성을 세뇌함으로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소유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피조물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목적과 사명을 미혹할 뿐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정답이 아닌 그럴듯한 논리나 주장을 따른 명분을 정답처럼 미혹하여 피조물의 본질을 따른 목적이나 사명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것인 것처럼 세뇌하여 미혹함으로 주객전도하여 서로 의지하고 돕는 상부상조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명분으로

 

참인 여호와의 뜻을 가리며 가로막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을 정당화하며 합리화 함으로 오히려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실족해 가고 있기에 실삶큐티란 이름으로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확인하고 누리기 위하여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내용이 국가와 가정과 조각바람을 지나 이제 새로운 피조물인 나로 그 주체가 명백해 진 것처럼 결국 실상처럼 보이지만 신기루 허상인 혈연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인연의 연결 고리인 틀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그렇게 갈망하는 여여를 아주 쉽고 편하게 일상처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실삶은 아직 피조물의 옷을 입고 있으니 신기루인 이 세상의 인연의 연결 고리를 억지로 끊으려고도 하지 않고. 더 끈끈하게 연결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직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의 발을 서로 씻기며 서로 사랑함으로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확인하고 누림으로 새로운 피조물인 나를 확인하고 누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주변의 인연의 연결고리가 점점 사라져 그 외모는 외롭고 고독한 외톨이처럼 보이지만 그 실삶은 온전한 편안함인 자유와 행복이 점점 충만해지고 있음을 확인하며 누리기보다

 

자신의 이상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 논리로 판단한 온전하지 못한 이 세상의 잣대로 우리의 실삶을 판단하여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거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를 하는 것처럼 필요한 부분만 삼키므로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는 표리부동의 비열하고 비겁한 모습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할뿐 아니라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영원히 누리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바로 알 때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고 하는 것처럼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표리부동의 헛되고 헛된 비열하고 비겁한 짓은 결국 스스로의 논리에 발목이 잡혀 자신의 멍에만 무겁게 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실삶큐티는 신기루 행복인 바람을 잡으려는 어떤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을 이 세상에 펼쳐 대단한 선생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의 삶을 위하여 서로 발을 씻기며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기에 온전함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공평타당함의 논리에 따른 점검이나 검정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한 각자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따른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에 억지로 맞추기 위하여 당당하게 토론하거나 비판하기보다 표리부동의 비굴함과 야비함으로 우리의 실삶을 판단하여 교묘하고 엄밀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척 하면서 자신의 헛된 주장을 펼치려고 하거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를 하는 것처럼 필요한 부분만 삼키므로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는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헛되고 헛된 공허만 남는 비참한 인생이 됨으로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나 학자나 책이나 논리나 주장으로도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는 것처럼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의 되기 전에도 새로운 피조물의 실삶을 절대로 알거나 깨달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약 알게 된다면 정답이라며 그렇게 나팔과 꽹과리 소리로 부르짖던 그들의 종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주장이나 논리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헛되고 헛된 신기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