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들의 구세주란 예수가 가르쳐 주었다고 주기도문 이라고 하는 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누가 복음 11장에서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형식으로 하라고 기록하였고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좀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문장으로 기록하여 그대로 암송만 하면 되는 것처럼 기록하여 지금도 주문처럼 암송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실삶은 복음의 무지로 태초부터 감추인 것처럼 보이는 신비인 복음을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을 따라 외모인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정답처럼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여 세뇌하고 있는 기도문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의미는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최후 승자가 되어 그 이름을 하늘과 땅에 드높이시며 하늘과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이는 회개함으로 복음으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누리길 바라는 여호와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결국 피조물 스스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한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신기루 도덕천을 표적으로 구하는 피조물의 간절한 뜻인 갈망과 소망으로 오히려 온전하신 여호와의 속성을 손상하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인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아야 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는 것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부족한 이성과 감성을 따라 공평 타당함의 논리로 판단하여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이 세상을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는 세상으로 만들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신기루 도덕천을 의지하여 이루기 위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함으로
그 외모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기도문처럼 보이지만 만약 기도문처럼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실삶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신기루 도덕천의 비위를 온전하게 잘 맞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어느 누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여 보여주는 신기루 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온전하게 영원히 누릴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주기도문 내용의 실삶은 헛되고 헛된 신기루인 이 세상에서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고 절대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참 평안인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보다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쉼이 없는 허황된 유혹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바로 알 때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실삶으로 확인하며 영원히 누리는 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신기루 믿음이나, 교육, 훈련 등으로 미혹하여 세뇌함으로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나 두려움을 따른 불안함인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한 것처럼 미혹한 주기도문으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등 온갖 감언이설과 권수술수가 난무하는 표리부동의 모습으로 그렇게 갈망하며 찾고 또 찾으려고 발악한 정답으로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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