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대상26장1-21절의 말씀은
어제 하나님께서 주신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와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인이라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라는 말씀은
목교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윗의 행동이 지혜롭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뜻을 빙자하고 왜곡하여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지키겠다는 욕망과 욕심의 어리석은 모습으로
이런 불신의 모습으로는 에베소서 4장에 말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교묘하게 빙자하는 불신의 모습으로 괜히 불가능에 도전하기보다 깨어 천제 증인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사랑의 속삭임을 멈추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 지는 길이라고 하신 후
오늘은 다윗이 레위 자손의 역할 중 문지기의 업무를 고라 족속에게 분담하며 아주 교묘하게 자신의 뜻을 하나님으로 뜻으로 일치 시켜가는 모습을 통하여 목교세들이 그렇게 앙망하는 다윗도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절대로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시고 우리 인생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분명하게 고백하게 하시며
이를 위하여 오늘 보여 주시는 “각 문을 지키기 위하여 그 종족을 따라 무론 대소하고 다 제비 뽑혔으니” 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자
목교세들이 말하는 다윗에 대한 평가처럼 정말 다윗이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고민하고 묵상을 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보여지는 모습의 출발점에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칼을 두려워하여 모세에 의하여 세워진 단을 외면하고 이곳에 세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6장을 비롯하여 성경에서 흐르는 내용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을 중심을 보신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 외모인 보여지는 결과를 가지고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판단함으로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어떤 주의나 결백증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를 하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비슷한 증상에 대하여는 관대 할 뿐 아니라 오히려 당위성과 정통성까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세뇌하여 많은 사람들로 착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즉 목교세들이 크리스천들을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주장하며 교회주의와 교회 결백증 환자로 만들고 있지만 목교세들은 어느 누구도 교회주의나 교회 결백증으로 인정하고 않고 교회에 가지 않는 경우에 무조건 이를 근거로 평가하고 판단을 한다. 이것이 정의이고 바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을 해 보았다 처음에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일 뿐 아니라 얼마나 더 자유롭고 편한지 말이다.
어제 우리 모임에서도 나누었지만 폭력이나 외박에 대하여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를 지키기 위한 본인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나 당위성 등을 위하여 심판관처럼 행동하면 오히려 본인들이 더 자유롭지 못한 수도자의 모습이 되어 결국 본인들이 그 함정에 빠져 힘들게 된다고 한 것처럼
교회출석이나 폭력이나 외박이나 술이나 담배나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나 어떤 것에 대하여 100% 완벽을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한 무지의 경우나 아니면 본인의 약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무엇이던지 완벽함이나 온전함을 믿거나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바로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부인하는 교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나, 교회나,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을 비롯하여 그 누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잘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이중적인 삶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살기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어신 사명인 목적을 이루어가는 삶을 산다고 해야 오히려 서로 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간다.
그래서 나는 어제 지체들에게 정말 아내를 자리에서 이해하고 위로하려면 그런 것 같은 모양보다 실제로 찾아가 결과에 관계없이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는 것이 좋다고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다윗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제비 뽑기의 모양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야망을 위한 것처럼 누구를 위하여 라고 하면서 자신을 정당성이나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 바른 행동인
것처럼 너무나 많이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조각바람 식구들은 우리들에게 밀려오는 예상 밖의 모든 것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누릴 수 있는 천제증인임을 기억하고 외형의 손상보다 사랑을 속삭임이 멈춰지는 것이 얼마나 더 심각한 것인지를 고민하며 밀려오는 오늘을 마음껏 그리고 신나게 누리는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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