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한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종교나 철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 각층뿐만 각계 각층의 각각의 사람들마다 이것이 정의라고 수많은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울리고 있지만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온전하고 완벽한 정의의 실체가 없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온전한 정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신기루 유혹과 명분의 멋진 세상을 만들자며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울리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성경에 기록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하는 경고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참을 가리고 가로 막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을 하는 자가 되어 결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그림처럼 됨으로 바로 알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란 인기 드라마에서 확인 한 것처럼 착하다는 실체는 혼미한 신기루임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자는 실체 없는 신기루 외모에 의미를 부여하며 또 충과 효나, 부모나 자식처럼 바르게 산다는 것 역시 분명한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살라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는 것이나
스스로 착하게 살지도 못하고 바르게 살지도 못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종교나 철학 그리고 정치, 경제, 사화, 문화 등 각계 각층의 대단한 선생들이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을 강요하기 위하여 울리는 나팔과 꽹과리 소리 역시 신기루인 바람을 잡으려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오히려 참을 가리고 가로 막는 불의와 불법의 똥칠이 됨으로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태초부터 감추인 신비처럼 보이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 회개함으로 피조물이 영생불멸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신비인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온전한 편안인 자유와 행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도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여호와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실삶으로 확인하며 영원히 누리는 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믿음이나, 교육, 훈련 등으로 미혹하여 세뇌함으로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나 두려움을 따른 불안함인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착하고 바르게 사는 정답이 아니라 도구로 부르짖는 정의를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과 권수술수가 난무하는 표리부동의 모습으로 그렇게 갈망하며 찾고 또 찾으려고 발악한 정답으로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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